울게 하소서!

     하도균 교수
     하도균 교수

요즈음 제가 많이 묵상하는 것은 눈물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울고 싶다는 것이지요. 세상 어디를 보더라도 웃을 일들이 많이 없고, 코로나 상황으로 인하여 오히려 가슴을 조이며 다가오는 일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얼마 전, 학생들 몇 명과 로마서의 내용을 함께 나누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엄연한 진리 앞에 모두 다 지적으로는 동감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눈물이 없는 사람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울고 싶지만, 그 마음이 눈물로 터지지 못한 것입니다. 울고 싶은데 마음이 너무 말라 있고, 또 울고 싶은데 계기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그렇게 나의 정서는 점점 더 메말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찍이 학교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제 마음을 만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우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저 “주님”만 반복해서 외치며 울기 시작하였지요. 
그런데 얼마나 큰 평안함이, 그리고 기쁨이 몰려왔는지 모릅니다.

현실적으로는 제 주변에서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뭔가가 해결된 느낌과 같은 감정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이 시기에 눈물은 너무나 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봅니다. ‘울라!’는 것이지요.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의 한계를 경험할 수밖에 없기에, 울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울어야 위로를 받습니다. 울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는 위로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지 못합니다. 위로는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위로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어려움을 경험할 때, 그 아픈 마음을 부모를 만나 먼저 눈물로 이야기하듯이, 하나님 앞에 눈물이 터질 수 있다면,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울지 못한다는 것은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며, 또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직접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일평생을 울면서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때가 되면 이 땅으로 돌아올 것입니다!”라며 일평생 울면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사랑이 와닿지 않았기에 예레미야의 설교를 무시했고, 결국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아는 이스라엘을 향해 슬픈 노래를 지어서 역사에 교훈으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예레미아 애가입니다. 세상에 어떤 시도, 세상에 어떠한 노래도, ‘예레미아 애가’와 같이 처절하고 애절한 내용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면서 마음이 많이 아프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품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자신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느냐”(말 1:2)고 반문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밑바닥까지 내려왔는데, 당신이 우리를 사랑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왔겠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그 후, 4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 “이것이 내 사랑이야! 이만큼 너희를 사랑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어떠한 사랑에 대한 경험도 없이 처음부터 십자가를 보여주셨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사랑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그 긴 시간 동안 사랑하고, 사랑하고, 정말 모든 것을 다 내어주면서 사랑했지만,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들이 잘못해서 힘든 상황이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너무 마음이 상하니까, 주께서 사랑하신 것이 맞는지를 반문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답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더 사랑을 보여줄까? 내가 어떻게 나의 사랑을 이 방법 외에 달리 입증할 수 있겠니? 너희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할 때, 나는 그때 내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 내 사랑을 보여줬어!”

십자가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십자가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인 십자가 아래서 주님께 외치고 있습니다. “울게 하소서!”, “십자가의 사랑이 깊게 느껴져 오늘도 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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