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제사와 정결예식

이성훈 목사
몇 번씩 되뇌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척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목적이기도 했습니다.(출 29:46) 한편 하나님이 인간과 교제하고 우리 안에 거하시고자 함은 우리에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거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죄로 인해 부정하게 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길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상태에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경우 그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거룩하지 못한 존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경우 하나님은 돌격해서 그 거룩하지 못한 것을 죽여 버리시기 때문입니다.(출 19:12, 22~24)

이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 그들로 하여금 몸을 씻고 옷을 빨고 성적 접촉을 삼가며 거룩을 요구하신 이유입니다.(출 19:9~10) 또한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시면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사실은 사실상 ‘복’이 분명합니다만, 이와 동시에 무서운 ‘심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경우 거룩하지 못한 존재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능력’(고전 1:18)이라는 말씀도 바로 이러한 원리에 기초합니다. ‘복음’은 구원 얻는 우리에게 한없는 ‘복’이 됩니다만,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곧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한 선재 조건이 있다면 오직 ‘거룩’이었습니다.

만일 부정한 상태일 경우 반드시 ‘거룩’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한 방법이 바로 레위기에 언급된 ‘제물 제사’입니다. 제사법을 통한 ‘죄’의 해결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또 한가지가 있다면 실수로 인해서 부정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를테면, 길을 가다가 죽은 동물의 시체를 밟는 경우입니다. 이는 의도함이 없이 부주의하여 시체와 접촉한 경우에서 비롯된 ‘부정’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은 ‘제사’가 아닌 ‘정결의식’을 통해 정결하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옷을 빨고 저녁까지 기다리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정에서 정결함으로 회복하는 길은 오직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하나는 ‘제물제사’이며, 또 하나는 ‘정결의식’이었습니다. 그 외에 부정에서 정결하게 되거나 정함에서 거룩하게 되는 길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 수천년을 지내온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마 8:2~3), ‘혈루증 앓는 여인’(마 9:20), ‘귀신들린 자’(마 10:1)와 같은 이들과 접촉하시기도 하시고, 또 그들의 접근을 허용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경우 예수님은 당연히 부정하게 되어 정결의식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예수님과 접촉함으로써 이들의 병이 치유됨으로써 오히려 ‘부정한 자’들이 ‘정한 존재’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 당시 오직 ‘동물 제사’와 ‘정결의식’의 패러다임에만 갇혀 있었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서가 이러한 사건을 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서는 단순히 예수님이 병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주기 위함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제물 제사’를 종식시킬 분이심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에서 예언된 오실 메시야임을 그 분의 치유의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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