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감독 부임

이종무 목사
초기성결교회의 명칭은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었다. 그 다음은 ‘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였다. 성결교회의 명칭에서 동양선교회가 삭제된 것은 해방 이후다.

동양선교회는 한국에서 한국의 사역을 총괄하고 성서학원을 운영할 만한 선교사를 찾았다. 그가 1910년 한국에 온 존 토마스 선교사(Thomas, Rev. John-土瑪洙)였다. 존 토마스는 1867년 12월 17일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나 동네에 있는 브니엘 교회에 다녔다.

그 후 런던으로 가서 형 데이비드와 동업하여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던 중 배터시(Battersea)에 있는 스펙홀(Speak Hall)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스펙홀은 영국의 유명한 성결운동지도자 해리스(Reader Harris)가 운영하던 선교단체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존 토마스에게 사역자로서의 훈련을 시켜 준 사람이 해리스였다.

그는 토마스가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사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줬다. 해리스는 토마스에게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방법,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 가치 있는 증거를 지혜롭게 선택하는 방법, 잘 준비된 주제를 가지고 결론을 짓는 방법 등 많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토마스는 1894년 5월 24일 에밀리 양과 스펙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에밀리는 독서를 좋아했고, 글쓰기를 즐겼다. 이것은 훗날 그가 수많은 선교보고서를 작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토마스는 약 5년 반 동안 스펙홀의 선교사역을 위해 일했다.  

토마스는 스펙홀의 선교사역을 통해 동양선교회와 만나게 되었다. 1905년 영국을 방문한 동양선교회 창설자 카우만을 만났고 1908년 가을에는 길보른을 만났다. 동양선교회 지도자들은 토마스가 한국동양선교회를 총괄하고 성서학원을 책임질 적임자로 그를 초청했다. 토마스는 초청을 수락하고 1910년 4월 22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매해 5월이면 하나님의 성서학원에서는 부흥집회가 열려 전국의 성결가족들이 모여 은혜를 체험하고 선교보고와 모금을 했다. 이런 집회를 앞두고 「하나님의 부흥사」지는 한국에 대한 특집으로 꾸몄다. 여기에 카우만과 토마스의 글과 한국사역에 대한 보고를 실었다. 그리고 한국사역을 위한 모금을 했다 

토마스는 카우만과 함께 미국의 성결지도자들을 만나 한국의 사역을 소개했다. 그리고 1910년 11월 12일 토요일 한국에 도착했고 다음날 13일 주일에 환영식을 했다. 토마스가 로마서 1장 8∽12절을 봉독하고 세계가 한국인의 신앙을 주목하고 있다면서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성령의 세례를 통한 모든 죄로부터의 현재적인 구원과 매일매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는 삶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고 설명했다.  

토마스가 한국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상적인 성서학원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토마스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서울의 전도관에서는 성경반이 운영되고 있었다. 김상준과 정빈이 약 25명의 학생을 모아서 매일 아침마다 성경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오후에는 전도활동에 나섰다.

성경반은 1909년에는 40~50명의 학생으로 빨리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입학하기를 원하는 학생이 많았는데 기숙사 시설이 마련되지 않아서 입학을 허가할 수 없었다. 약 1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와 500~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도관의 건물이 필요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