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밤만 참아 보시지요. 그러면 다음번에는 참기가 좀 더 쉬워지고, 그다음에는 더더욱 수월해진답니다. 습관이란 타고난 천성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녔기에 악마를 굴복시키거나 몰아내 버리지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대한 아무런 전이해 없이 이 부분만 읽으면, 이 대사로 묘사된 여인은 오로지 육욕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여성들이 반기를 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질 정도로.

▨… 햄릿은, 인간이라면 형을 독살하고, 왕좌를 빼앗고, 그 형수를 아내로 삼는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기에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판단하지 못하는 수렁에 빠져버렸다. 심리학적 용어로 ‘내적 카오스’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의지해왔던 가치기준, 자기인식이 모두 붕괴된 상태에서 어머니를 향한 분노만 터뜨린 것이다.

▨… 그 분노가 하나로 뭉뚱그려진 대사가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다. 이 대사의 진실여부야 어떠하든지 인간의 삶과 역사가 남성 중심적으로 기록되고 해석되어온 오랜 관행이 못마땅한 페미니즘의 사람들은 햄릿 류의 여성이해를 거부한다. 그것이 오늘의 세태다. 실제로 오늘의 시대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라고 규정한다. 역사(History)를 His story로 오인할 우려가 있으니 Herstory로 표기하자는 견해까지 제안되지 않았었는가.

▨… 사도 바울의 편지 일부분과 하나님 아버지라는 칭호 등이 교회의 성평등 이해의 걸림돌이 된다는 ‘여성신학’ 주창자들의 지적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성평등 위에 서 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도 그 가르침을 따라 성평등을 목표하고 달려왔다. 오늘의 세계가 성평등을 주장하는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시발점을 성서와 교회가 마련해 주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 그러나 우리 교단의 현실에서는 성평등은 구호일 뿐 그 실천은 요원하기만 하다. 여목사, 여장로 제도를 시행하고는 있지만 명목만의 제도 아닌가. 총회에 여성대의원이 몇 명이나 파송되는가를 확인하면 답은 자명해질 것이다. 자립교회 담임 여목사 수는 전체 교역자의 몇 퍼센트 쯤 되는가를 묻는다면 우문중에 우문일 것이다. 우리교단이 성령의 역사를 외치기 위해서는 성평등에서도 성령의 역사를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성평등을 위한 지방회의 획기적인 제안이 필요한 이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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