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6)
1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해 준 미국의 선교사들은 우리에게 잘못된 기도를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한다.

영어의 ‘bless’란 동사는 첫째, ‘복을 내려주다’ 둘째, ‘복을 빌어주다’의 두 가지 뜻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선교사들은 한국어 축복이란 동사도 이와 같을 것으로 생각하여 우리 신자들에게 “하나님 축복해 주십시오. God, bless us.”라고 가르쳐 주어서 한문을 잘 아는 사람들마저도 그렇게 추종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축복 하신다”는 말씀은 찾아볼 수 없다. 창세기 12장 3절에 분명히 나와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성경말씀대로 앞으로 모든 목회자와 신자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폄하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복을 빌어주는 인간과 같은 존재로 하나님을 전락시키는 큰 죄가 된다. 복을 주시는 그 분에게 “복을 빌어주십시오”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실 것이다. “그래, 너에게 복 내려 달라고 내가 누구에게 빌면 되겠느냐?”

이와 같은 오류를 만들어 낸 원인 중에는 한글전용 정책도 있다. 우리말 단어 중 순수한 우리 낱말 외에는 전부 뜻글자인 한자어인데 그 단어들을 소리글인 한글로만 표현하니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그런 일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할 때 이 ‘유례’는 ‘비슷한 예’란 뜻으로 한자로는 ‘類例’이다. 그런데 이 유례의 뜻을 모르는 젊은 목회자나 기자들은 “그런 일은 유래가 없다”라고 쓴다. 이 ‘유래’는 역사, 내력을 가리키는 ‘유래(由來)’ 것이다. 이것은 “그 일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등에나 쓰여야 할 말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글전용 정책 때문이다. 머잖아 ‘유례’와 ‘유래’는 동의어가 돼 버릴 처참한 운명에 놓여 있다.

한편 극소수의 목회자들은 한문을 독학으로 정복하여 깜짝 놀랄 수준으로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런 분들은 국보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신학대학에서는 반드시 국한문 성경을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성경한자란 과목을 필수로 이수하도록 해야 한다.

어느 예배에서 축사를 한 목회자는 “저는 예수님처럼 오병이어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훌륭한 ‘축사’를 못하니 양해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하신 축사는 무슨 단어였을까? 누구를 축복하고 축하하는 뜻의 ‘祝辭’였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 하신 축사는 바로 ‘祝謝’로서 하나님께 빌고 감사하는 뜻이었다.

더욱 참담한 예를 들어 보겠다. 어느 목회자가 “나는 사람이 음식점에 가서 밥 먹는 것 즉 외식(外食)을 예수님이 싫어하신 줄 알고 절대로 식당에 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자 두 가지 ‘외식’의 뜻을 아는 한 두 사람만 빙긋이 미소 지었을 뿐 회중 대다수는 침묵을 지켰다. 그 회중들이 ‘외식(外飾)’ 즉 마태복음에 나오는 ‘외면치레, 겉만 꾸민다’는 이 ‘외식’을 알았었다면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外飾)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16)

이 글을 읽는 수많은 독자들은 ‘외식(外食)’과 ‘외식’(外飾)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복’과 ‘축복’의 뜻을 정확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영광 돌리도록 노력해 주기를 바라고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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