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은퇴 후 교회 사택에서 천안 서북쪽의 읍으로 거주지를 이전하였다. 은퇴한 후 도시생활에 젖은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여유가 있는 생활에 적응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다.

버스를 타고, 무임전철과 완행열차를 타고 차창너머 풍경을 감상하면서 인생은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때 나는  ‘세상을 바꾸려 하였지만, 정작 바뀌어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2019년 새해 아침에 아내와 인근 성거산(聖居山)에 갔다. 성거산은 한국교회사에서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 끝날 때 박해를 피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살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특히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이 피신하여 살았던 곳이다. 성거산 교우촌 출신 순교자 23명 중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소학골 출신 5분의 순교자들과 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 이러한 교회사의 현장을 발견한 필자는 성거(성스러울 聖, 있을 居)가 ‘성스러운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임을 알았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17층 아파트 거실에서 멀리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차들을 바라보며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들의 안전과 안정된 삶을 위하여 기도한다. 또한 기도노트를 펼쳐보며 마음에 담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한 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독서로 하루의 일과를 연다.

‘초기 기독교와 로마사회’를 읽으며 발췌한 내용이다. 저자는 초기 기독교 확장의 요인을 당시 기독교인들이 불신자들에게 감동을 주어 신앙을 갖게 한 사례들을 열거하였고, 교부들의 문서에는 불신자들에게 전도를 촉구하는 내용이 없음에도 복음은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고 하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극심한 탄압과 박해와 순교직전에서 보인 침착하고 품위 있는 행동. 바른 예절. 냉정을 잃지 않는 용기. 원수들을 대하는 예의.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회에서 기독교에 호감을 갖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창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의 생활 태도는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삶. 이기적 물질주의에 매몰되지 않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평등을 실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함’이었다고 한다.

100세 시대를 사는 김형석 교수가 모 일간지에 게재한 칼럼을 보았다. ‘목사들은 설교도 잘하고 신학자는 학설을 펴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터득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현대인들은 예수의 의심 깊은 제자(도마)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상흔을 보여주기 원한다.’ 라는 글이었다. 이 글은 목사와 신학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글이 아니라 한국교회와 신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지침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신유박해 때부터 병인박해 끝날 때까지 순교 현장에 살았던 이들과 로마시대에 박해를 당하였던 기독교인들을 생각하며 신앙의 진정한 가치와 힘은 어떠한 환경에서 발현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힘을 어떻게 발현하여야 하는 가 생각하며, 오늘의 말씀으로 산상수훈을 읽는다. 그리고 이기적 물질주의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고 이웃을 사랑하되, 기회가 있을 때 사회적 약자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일상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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