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시는 하나님

세상이 힘들고 어려운 까닭이 있습니다. 감사를 잃어버리고 은혜를 잊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은혜를 생각하고 묵상하면 우리의 생각은 물론이요, 삶도 좋아질 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그 세상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왔고, 그 결과는 사망이었습니다. 그 사망의 권세는 무지막지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오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한 나머지 타락하고 세상을 망가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한 죄는 점점 더 증폭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홍수 심판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홍수는 심판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홍수 이야기에서 심판은 부가적인 내용에 불과합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홍수 이야기 중심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기억하신다(히.자카르)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가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소위 ‘교차 대조법’이라고 하는 히브리어의 구조를 통한 메시지 전달 방법입니다. ‘교차대조법’이란 두께와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 여러장의 나무를 덧붙인 합판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합판은 중심이 되는 합판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 여러장의 합판을 덧붙인 이치와 비슷합니다.

예를들어 성경 본문에서 1~9절까지 진행될 때에 1절과 9절의 맥락이 매우 비슷하거나 동일한 단어를 씁니다. 그리고 2절과 8절의 맥락이, 3절과 7절이 4절과 6절의 맥락이 비슷하거나 동일하게 배열 되어 있고, 그 중심은 5절입니다. 

창세기 6장 11절~8장 22절까지는 전반부는 ‘창조의 파괴’가 있고 후반부는 ‘재창조’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되는 부분이 바로 창세기 8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다’(히.자카르)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하여 홍수 심판이 변하여 재 창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중심으로 홍수의 심판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고,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중심이 될 때 비로서 홍수 이야기는 온전한 이야기로 들려질 수 있습니다.

어디 홍수의 심판 이야기만 그렇습니까! 우리는 본래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멸망했어도 벌써 멸망했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그냥 놔두면 분명히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세상과는 견줄 수 없는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우리 같이 버려져서 멸망당해도 벌써 당했어야 할 존재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죽음의 권세에 넘어간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망아 네가 과연 내게 할 수 있는 게 있느냐”(고전 15:55 참조)라고 큰 소리 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묵상했던 시편의 신앙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을 보답할까(시 116:12)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은혜를 묵상하지 않습니다. 대신 부모에게 내 놓으라고 생떼 부리는 철없는 아이처럼 아픔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묵상하다가 하나님께 상처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이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은혜가 충만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