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즈메이니아.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동남쪽으로 약 24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절반 쯤인 크기의 섬. 자연이 잘 보존되어 현대문명에 찌들어버린 심신을 ‘힐링’할 수 있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다. 1770년 경 제임스 쿡이 첫발을 내딛기 전까지는 거의 10000년 동안이나 인류 역사와는 어떤 접촉도 없이 태즈메이니아인들은 그들만의 삶과 문화를 지켜왔었다.

▨… 트루가니니. 그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최후의 생존자. 제임스 쿡의 방문이 이뤄진지 1세기도 지나지 않아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에 의해 사냥감이 되어버린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멸절당했다. 1876년, 최후의 원주민 여인 트루가니니가 사망하자 오스트레일리아의 백인들은 그녀를 박제해 태즈메이니아 박물관에 전시했다. 박물관은 1976년에 이르러서야 그녀의 매장을 허락했다.

▨… 유발 하라리(사피엔스의 저자)와 재레드 다이아몬드(총, 균, 쇠의 저자)의 증언을 종합하면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멸절에 대해 교회는 수수방관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어느 면에서 보면 공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여 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 최후 생존자들은 기독교복음주의 교파가 운영하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기독교를 배웠지만 태즈메이니아인들은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유일한 길, 죽음을 선택했다.

▨…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태즈메이니아인 처리 문제에 오스트레일리아 교회가 ‘아니오’했다면 태즈메이니아인들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본회퍼 목사는 ‘아니오’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던져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신시대를 거치며 ‘아니오’라고 해야 할 때 하지 못했던 많은 지성인들이, 기자들이 붓을 꺾었다.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교회를 향해서 루터는 95개조의 선언문으로 목숨을 걸었었다.

▨… 트루가니니는 박제되어 자신과 동족의 슬픈 운명을 증언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교회가 제국주의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음도 밝혀 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교회는 대영제국을 향해 ‘아니오’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성결교회는 일제에 의한 폐쇄를 무슨 훈장처럼 내세운다. 그러나 그 훈장은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녹슬고 있다. 더 이상은 내세우기 멋쩍을 만큼…. ‘아니오’를 말하지 않는 데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교단이 ‘예’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면… 무슨 잠꼬대냐고 비웃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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