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함무라비(B.C.1750년 경)왕은 인류 최초의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으로 그 이름을 우리에게 알렸다. 함무라비 법전은 법조문과 판례 모음집인데 그 중에는 우리 기독교인의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도 있다. “만일 귀족 남자가 다른 귀족 남자의 눈을 멀게 한다면 그의 눈도 멀게 하라. 만일 귀족 남자가 다른 귀족 남자의 뼈를 부러뜨린다면 그의 뼈도 부러뜨려라.”

▨… 소위 ‘눈에는 눈으로’라는 보복법의 원칙은 모세의 율법(출애굽기 21장)보다 삼, 사백년 전에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함무라비 법전이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함무라비 법전은 이런 조문도 우리에게 보여주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만일 귀족 남자가 임신 중인 평민 여성을 때려서 유산시킨다면 은 5세겔을, 만일 그 여자가 사망한다면 은 30세겔을 저울에 달아 주어야 한다.”

▨… 은 30세겔은 모세의 율법에도 등장한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되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 은 삼십은 모세로부터 일천 사, 오백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신약성서에도 등장한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마태복음 27장)

▨… 도대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예수님의 생명 값을 은 삼십으로 책정한 것일까. 함무라비 법전이나 모세의 율법이 임신한 여인이나 남종이나 여종의 생명 값을 은 삼십으로 계산하도록 한 적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까마득한 옛날 일인데 어떻게 물가변동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하기야 한 인간의 생명이 우주보다 귀하다는 그 분의 가르침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귀동냥이나 한 적 있을까.

▨… 아니면 만인을 섬기러 오신 그 분은 만인의 종이었으므로 그 생명 값은 함무라비 법전이나 모세의 율법이 정한 바대로 종의 죽음에 해당하는 은 삼십이어야만 한다는 데에 하나님의 섭리가 감춰져 있는 것일까. 은 삼십의 모욕조차 아버지의 잔으로 순종하며 받는 그 분의 모습을, 오늘 그 분의 제자들이 흉내라도 내어 ‘예수 없는 기독교’, ‘예수를 잃어버린 교회’라는 비판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의 터가 아겔다마일 수는 없기에 하는 말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