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적 불평등 상태에 대한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원인 분석과 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 제시는, 불평등이라는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한국사회에서도 적극적으로 담론화 하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피케티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제시한 ‘글로벌 자본세’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경제적 불평등이 이 시대가 해결해야 할 우선적 과제라는 점에는 한 목소리로 동의하고 있다.

▨…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불평등 해소를 위해 가난한 나라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경제적 불평등 해소의 주요한 메커니즘은 지식의 확산이기에 가난한 국가들이 부유한 국가들과 똑같은 수준의 전문적인 노하우, 기술, 교육 수준을 확보할 때 부유한 국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식의 확산은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가 아니라고도 강조하였다.

▨… 피케티가 말하는 부유한 국가들을 큰 교회로, 가난한 국가들을 개척교회로 대치시킨다면 너무 세속적인가. 아니, 그런 만용을 부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개척의 현장에서 어버이날도, 어린이날도 애써 모르는 체하며 무릎 꿇고 있는 이들을 향해 ‘교회 성장의 비법’을 전수받으라고 강요만 하는 교단적 현실은 그 비법, 노하우는 만나처럼 썩는 것이 아니니 많이 쌓아 두어도 무방하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다.

▨… 어느 경제학자가 소득의 발생 원인에는 노력, 능력, 운이 있고 그 밖에 특권도 있다고 지적했다.(김윤상, ‘불평등의 특권’) 운이 인간의 통제 바깥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엄하지만, 성령의 역사로 그 자리를 대치한다면 교회성장론을 소득발생 이론에 매치업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성장론이 아무려니 자본주의의 시장논리에 빗대어져서야 되겠는가.

▨… 공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거나 섭섭해 하지 않으면 군자라고 부를만하다(人不知而不  , 不亦君子乎)”고 하였다. 조금 조심스럽게 흉내를 낸다면 남의 큰 교회 보고 시기하거나 섭섭한 마음 갖지 않으면 비로소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를만하다 한다면, 과언일까. 이제 갓 목사 안수 받은 113명의 하나님의 종들이 교회성장을 제일의 목표로 삼다가 자본주의 시장논리의 희생제물이 될까 저어되어 ‘불평등도 성령의 역사’라고 억지 부리고자 한다. 조금 슬프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