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인 헌신의 삶을 다짐했던 순례자 루터

▲ 만스펠트 마을은 루터가 14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낸 곳이다.
루터의 도시 아이슬레벤
아이슬레벤에 도착해 루터가 태어난 생가(Geburthaus)를 찾았다. 집 마당에는 루터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생가 옆에는 박물관이 세워져 있었다. 각 전시 공간에는 루터 당시의 아이슬레벤 모습과 부모들의 기록, 광산과 광부의 삶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공간은 루터 가족이 머물렀던 곳으로 작은 거실과 부엌, 침실이었다. 복원된 탁자와 물잔, 벽난로와 루터가 누웠던 요람도 놓여 있었다.

루터의 생가를 나서 세례를 받은 성 베드로-바울교회로 향했다. 새롭게 리모델링된 교회는 회중석 앞에 큰 세례(침례)탕이 만들어져 루터 세례 의미를 되살렸다. 예배당을 둘러 본 후 교회당 뒤편 작은 예배실을 찾았다. 오래된 제단과 작은 세례반이 놓여 있는 이곳은 오랫동안 루터가 세례 받았던 장소로 인정되어 왔던 곳이다.

아쉽게도 세례반은 폐쇄된 성 니콜라이교회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루터는 이 세례를 평생 기억했고 중요시 여겼다. 그는 책상에 라틴어로 ‘나는 세례 받았다’는 말을 새겨 놓았고 힘들 때, 회의감이 들 때 이 문장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 루터 분수대의 어린 루터
어린 시절의 꿈과 소망, 만스펠트
루터의 알파와 오메가로 평가받는 아이슬레벤에 비해 만스펠트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동네이다. 하지만 만스펠트는 14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다음으로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곳이다. 또한 부모가 평생 정착해 살았고 그의 형제의 동네이기도 하다. 만스펠트에 도착한 루터의 부모는 작은 집을 임대해 살면서 광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그들은 새 집을 구입했고, 아버지는 작은 제련소를 운영하다 시의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른 아침 만스펠트에 도착해 그가 거닐었던 마을길과 언덕, 공부했던 예배당 옆 라틴어학교 건물, 만스펠트 백작성 등을 둘러봤다. 마을 앞으로 계곡 물이 흐르는 만스펠트는 100여 가구 미만의 작은 동네였다. 이곳에서 자란 루터는 다섯 살 때 라틴어학교에 등록해 읽기, 쓰기, 음악과 산수 등 기초 학교교육을 받았다.

루터가 자신의 미래의 꿈을 그리며 쳐다봤을 만스펠트 성에 올랐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던 때 이곳을 찾은 루터는 몇 차례 설교했다고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주민들 앞에서 루터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나의 고향은 만스펠트입니다…’로 시작되었을 그의 설교가 궁금해진다.

청소년시절의 고향 아이제나흐
루터는 1497년 당시 만스펠트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모와 떨어져 마그데부르크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부속학교는 현대적 경건 그룹이 운영하던 학교로, 이곳에서 루터는 중세 수도원적 공동생활의 한 단면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1년 후 외가 쪽 친척들이 있는 아이제나흐로 옮겨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렇지만 경제적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외가 친척들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루터는 학교의 조그마한 방에서 잠시 지냈고, 명문 귀족 집을 다니며 노래를 부르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가 코타 씨 부인의 도움으로 한 곳에 머물게 됐고 라틴어학교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됐다.

아이제나흐를 찾아 루터가 머물며 공부했던 루터 하우스와 그가 아동합창단에 속해 노래했던 게오르크교회 등을 방문했다. 3년 전과 달리 루터하우스는 새 건물도 들어서고 전시공간도 새롭게 마련됐다. 교회 또한 예배당 강단 쪽 벽을 새롭게 보수하고 있었다.

닫혀져 있었던 루터 당시의 교실을 관리자의 배려로 들어설 수 있었다. 루터는 작은 교실에서 공부했고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부모를 떠나 외로운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루터에게 공부는 새로운 삶의 탈출구였음이 분명했다. 그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켰고 루터는 에어푸르트 대학에 진학해 자신의 꿈을 실천하게 된다.

▲ 슈토테른하임
열정의 도시 에르푸어트와 벼락체험
1501년 루터는 에르푸어트 대학에 진학하여 4년간 일반 교양과정의 학사와 석사 과정을 공부한 후 학위를 받았고 부친의 권유대로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루터가 공부했던 에르푸어트 옛 대학 건물과 그가 예배드렸던 대학교회 ‘미카엘교회’를 둘러봤다.

옛 대학은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다가 일부만 복원되었는데, 과거 흔적은 건물 전면의 조각과 파괴와 복원을 담은 사진 몇장이 전부였다. 루터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논리학 등을 배웠으며 가브리엘 비엘이라는 스승을 통해 윌리엄 오캄의 유명론 등을 배웠다고 한다. 특히 루터는 이곳 도서관에서 라틴어 성서를 처음으로 접했고 한동안 성서의 말씀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루터의 법학공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명성과 부귀를 얻을 수 있는 법률가의 길을 포기하고 가난한 수도사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바로 성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가 수도사가 된 것은 슈토테른하임에서 있었던 체험 때문이다. 루터는 에르푸르트 근교인 슈토테른하임에서 심한 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만났고 생명의 위기를 경험한다. 당시 루터는 광부의 수호성인인 성 안나를 부르며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해가 지는 시간 슈토테른하임을 찾았다. 루터 생애의 전환점이 된 장소에는 루터의 사건을 기념하는 비석과 그 내용을 설명한 안내문, 잠시 쉬어가도록 만들어진 의자가 전부였다. 비석에는 ‘거룩한 땅, 종교개혁의 전환점, 여기 하늘에서 온 번개 안에서 젊은 루터에게 그 길이 제시되었다.(앞) 성 안나여, 도우소서. 나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뒤)’등이 새겨져 있었다.

가끔 한 대씩 지나는 차들을 제외하곤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그곳에 한 참 앉아 있었다. 그리고 루터가 두려워했을 그 때 그날의 장면을 떠올려 봤다. 아마도 번개 체험은 여러 가지 문제로 고뇌하던 루터를 수도사로 이끈 결정적 계기임이 분명했다. 그를 사로잡았던 라틴어 성서, 미카엘교회의 말씀, 대학과 5분여 거리에 위치한 수도원 수도사들의 모습 등 다양한 체험이 벼락 사건과 만나 그를 수도원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밤에 루터가 에루푸어트 대학에 다닐 때 살았던 ‘게오르겐부어세’(게오르겐기숙사)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이곳은 루터 시대 대학생 기숙사로서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공부하던 루터가 친구들과 함께 살았던 곳이다.

벼락체험 후 루터는 이곳에서 며칠간 뜬 눈으로 밤을 새웠을 것이다. 그가 깊이 고뇌했을 그곳, 순례자 공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말씀을 읽고 조용히 묵상했다. 그리고 루터처럼 기도한다. ‘나는 이곳에 홀로 섰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 루터가 신부가 된 에르푸르트 대성당
성 어거스틴 수도원을 찾아
벼락 사건 후 고민하던 루터는 7월 15일 밤 성 어거스틴 수도원 문을 두드렸다. 기록에 따르면 12시를 넘겨 이튿날 새벽으로 가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수도원 문이 열렸을 때 루터는 자신의 결단과 고백의 이유를 설명했고 손님으로 받아들여져 수도사의 자격을 갖추기까지 엄격한 규칙과 훈련을 거쳐야 했다. 수도사가 된 루터는 청빈과 순결, 순명을 서약하고 매일 기도와 시편 묵상, 성가, 독서로 일과를 보냈을 것이다.

그가 훈련을 받고 자신의 실존문제를 놓고 기도했던 수도원 내부와 예배당, 수도사들의 방 등을 차례로 둘러봤다. 그가 머물던 수도사의 방은 빛이 들어오는 조그마한 창문에 독서와 기도를 위한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다른 수도원보다 더욱 엄격했던 수도원에서 루터는 2년 만에 사제가 된다. 밤새워 고뇌하며 기도했던 그의 열심은 수도사로서 합격점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사제로 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집전했던 에르푸어트 대성당을 찾았다. 루터는 이곳에서 사제로서 가장 낮은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것을 서약했다. 첫 미사 집전 때 사제가 되는 것을 못마땅했던 루터의 아버지도 축하 사절을 이끌고 직접 참석했다.

수도사 루터의 삶과 고뇌, 그의 발걸음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죽음 앞에 선 실존자로서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