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타콤에 숨어 하나님을 찾아야 했던 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세상권력과 타협했을 때 교회는 그 지긋지긋했던 핍박의 수난도 떨쳐내버릴 수 있어서 만세를 불렀다. 기독교인이라는 호칭은 이제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견장이 되었다. 카타콤에서 카타콤으로 자신의 몸을 감춰야만 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이 주는 평화(팍스로마나)에 안주하는 사태가 빚어져 버렸다.

▨… 테르툴리아누스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영적 체험에 대한 갈망은 아침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믿음은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절대적 조건이 아니라 단지 교회에서 행해지는 의식이나 사제들이 가르치는 교리 안에서만 언급되는 필요조건일 뿐이었다. 때문에 회개도 헌금을 드리는 행위로 대신할 수 있었고 교회는 제3자가 회개를 대신하는 행위도 용인했었다.

▨… 로마제국의 평화에 침잠했던 교회를 깨운 것은 수도원 운동이었다. 수도원들은 초대교회가 순교로 지켜온 믿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삶의 실천을 요청하였다.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권력과 명예를 포기하는 복종, 소유를 포기하는 가난, 이성을 향한 욕망을 포기하는 순결을 지키는 서약을 하도록 한 것이다.

▨… 수도사들의 이 3가지 포기가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금욕주의로 표기된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침윤당한 오늘의 교회는 그 3가지를 포기하지 않고도 영적성장, 영성충만이 이뤄질 수 있음을 주장한다. 우리 성결교회는 이런 자본주의가 주는 평안에 안주하려는 교회의 모습에 도전하여 목사안수후보자들의 영성을 철저하게 검증할 것을 공표하였다.

▨… 그 검증이 주의 종이 되기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영성일지’ 점검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믿음을 의식(예배)으로만 찾으려 했던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웨슬리에 의하면 자아로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비우는 전적인 부정과 헌신은 전(全)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서만 가능하다. 곧 그가 채찍질 당하셨던 관정에까지, 그가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던 갈보리까지, 전체를 포기하고 벌거벗은 채로 벌거벗은 그리스도를 좇아야 한다(존 웨슬리, 그리스도인의 완전)는 것이다. 이 좇음이 성결인 목사의 선결조건이 아닐 수 없다. 너무 큰 부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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