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겐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전 14:34) 앞뒤를 잘라버린 채 이 말씀만 본다면 바울은 성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실제로 어느 여성신학자는 오늘의 가부장적이고 교권화된 교회 전통이 이 말씀 뒤에 숨어서 여성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하고 여성 성직을 반대해 왔다고 고발한다.(최영실, 바울과 성차별)

▨…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셨던 당시나 초대교회 때의 유대사회가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였음은 더 이상 추론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그와 같은 사회의 분위기를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을 때였음에도 예수께서는 죄인으로 정죄된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을 받아들이셨고 식사의 자리에 불쑥 뛰어든 불청객, 옥합을 깨뜨리는 여인의 무례를 용납하시며 오히려 칭찬해 주셨다.

▨… 바울 역시 당시의 로마와 헬라의 남성중심적 사회구조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단호하게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차별이 없음을 밝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일 수밖에 없음에도 뵈뵈, 유오디아 등의 초대교회 여성지도자들을 동역자로 불렀다. 이런 남녀평등의 초대교회가 밀란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세속권력과 타협하는 과정을 겪으며 점차 교회 안에서 여성지도자가 사라지는 결과가 빚어졌다.

▨… 벤델(E.M. Wendel)은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인 제도적 교회에서 소외당해온 여성의 자리를 오히려 주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자리로 이해하려 했다. 부활의 주님을 가장 먼저 뵈올 수 있는 영광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허락하셨기에 오늘 애통하는 자리가 곧 천국을 약속받게 함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듯 애통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여성의 것이라는 믿음이다.

▨… “마리아야” 그 분이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죄와 울음의 여자’(김남조)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김춘수의 ‘꽃’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그 새벽 동산에서 부른 이름에 담겨진 위로와 사랑, 새날에의 약속을 “당신 누우신 동산에 남아/겨웁도록 빌며 머리 풀고 섰으렵니다.”(김남조, 마리아 막달레나)던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헌신으로 가슴에 안았다. 이 결단 외에 무엇이 한국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이 땅의 막달라 마리아들의 헌신이 한국교회의 최후의 보루라면, 과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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