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남을 더 사랑한 진정한 목회자
진도군, 의사자 지정 신청 … 교계는 서명운동

 

▲김금숙 사모와 자녀들

고 문명수 목사의 삶은 희생과 섬김의 연속이었다. 평생 자신의 것을 나누고 타인을 섬기는데 앞장섰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이웃을 섬기다 끝내 일찍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고 복음을 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명수 목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세월호 봉사에 앞장선 것은 당연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웃 사랑이 넘쳤던 그가 참사를 외면할 리 없었다는 설명이다. 광주지방회장 송옥산 목사는 “문명수 목사님은 제대로 된 양복 한 벌 없을 정도로 자신을 위해서는 아꼈지만 타인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퍼주었다”며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집에 있는 물건까지 퍼줬을 정도로 문 목사님은 사랑 많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도 기꺼이 돕고 이웃의 어려운 형편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선행을 밝히는 것을 꺼려하는 탓에 주변 목회자들도 그의 행적을 정확하게 알진 못했지만 평소 행동을 보며 ‘사랑 많은 목사님’이라고 추억했다. 천만선 목사(진도광석교회)는 “같이 차를 타고 갈 때도 어린아이가 울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서 울음을 달래주셨던 모습이 기억난다”며 “이웃을 사랑하는 남다른 애정과 마음을 가졌던 목사님이셨다”고 기억했다.

세월호 참사 후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른 목회자의 병문안을 가거나 팽목항을 다시 찾아서 봉사자들을 격려했던 것도 그의 희생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이다.

문명수 목사는 1963년 아버지 문성석 씨와 어머니 고양금 전도사 사이의 둘째 아들로 진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이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어머니의 뜨거운 신앙을 물려받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했다. 어머니 고양금 전도사는 ‘진도의 문준경’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진도 지역 복음화에 앞장선 인물이다. 문명수 목사가 시무했던 진도만나교회를 비롯해 진도지역에 6개 교회를 개척하거나 건축했다. 문명수 목사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늦깎이 목회자가 되었다.

특히 그는 목회경력 23년 동안 대부분 고향 진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1996년부터 진도만나교회에서 담임으로 시무하며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교회 성전을 건축했으며 올해 진도군교회연합회장을 맡으며 지역 선교에 더 적극 참여했다.

이웃사랑이 각별했던 그에게 진도에서 벌어진 세월호 참사는 감당치 못할 큰 고통이었다. 그는 아들 문광식 군과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겪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슬퍼했다. 진도군교회연합회장으로서 참사 현장에 나가서 누구보다 열심히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을 도왔다.

문현성 목사(진도제일교회)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직후 지원 체계가 잡히지 않아 우왕좌왕할 때 문명수 목사가 연합회 회장이라는 책임감으로 솔선수범해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며 “잠도 못자고 힘든 날이 계속되었지만 아무리 배가 고프고 피곤해도 우직하게 봉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병은 깊어갔다. 지난 4월 처음 쓰러진 이후 병은 계속 악화됐고 결국 지난 10월 3일 오전 11시 경 소천했다. 문명수 목사는 잠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도 세월호 유가족들을 염려했다고 한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자신 보다 타인을 걱정했다.

이러한 희생을 알기에 본 교단은 문명수 목사의 의사자 지정을 위해 나섰고 진도군은 공식적으로 정부에 의사자 지정을 신청했다. 문명수 목사가 이웃을 섬겼던 것처럼 한국교회와 정부가 그의 가족에게 사랑을 보여줘야 할 때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