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희 박사(서울신대)
도미니크(Santo Doningo De Guzman, 1170~1221)는 스페인 북쪽 칼라루에냐(Calaruega)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남부 프랑스지역에서 준동하던 이단 카타리파(Cathars, 일명 알비파, 물질적인 세계는 악하며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저등한 신이 창조한 것이라고 주장한 이단)를 몰아내기 위해 도미니크를 남부 프랑스로 파송했다.

도미니크는 그곳에서 비록 이단들이 진리에 서 있지는 않았으나 청빈 생활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고,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청빈한 생활을 하며 설교할 때 진정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216년 오순절 즈음에 수도회를 설립했는데, 1216년 12월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규율을 채택한 수도회로서 도미니크 설교자수도회의 창설을 인가했고, 수도회는 1217년부터 카다리파 거주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도미니크는 1207년 초 프뤼예(Prouille)에 카타리파에서 개종한 여인들을 위한 수녀원을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도미니크 수도회의 실질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도미니크는 청빈을 강조하여 1220년 제1회 도미니크 설교자수도회 총회에서 탁발(그 당시까지의 성직자들의 구걸생활은 금지되어 있었다) 생활을 원칙으로 하는 규약을 제정했다. 지금까지 수도사의 재산 소유를 금지했지만 수도원은 가능했다.

그러나 도미니크는 수도원의 재산 소유도 불허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함께 중세의 양대 탁발 수도회라 할 수 있다. 도미니크는 1221년 8월 6일 볼로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수도회는 영국, 스칸디나비아, 헝가리, 독일 등 전 유럽으로 급속히 확장되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설교 및 성서와 학문연구를 중요시했는데,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설교를 잘해야 한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까닭에 이들을 설교자수도회(Ordo fratrum praedicatorum)라고 부른다.

수도사는 설교할 자격을 얻기 위해 4년 동안 볼로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3년 동안 파리에서 다시 신학을 공부했다. 이들은 대학도시에 선교사들을 보냈다. 남자 수도사는 설교에, 여자 수도사는 교육에 종사했다.

수도사들은 밖은 검은색이고 속은 흰 모자가 달린 검은 외투를 착용했으며 고위직은 흰 모자, 일반회원들은 검은 모자를 썼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검은 의상 때문에 검은 옷의 수도사들(Black Friars)이라고도 불렸다.

중세 스콜라신학의 핵심인물들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존 타울러, 사보나롤라 등이 이 수도회 출신이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1232년부터 종교재판에 관여했다.

초기에는 이단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그들의 비정통적 신앙을 깨우쳐 회심을 유도하고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였으나 1415년 보헤미아의 개혁자 얀 후스 재판에서 볼 수 있듯이 고문과 화형이라는 폭력을 사용하고 중세 마녀사냥을 주도했다. 따라서 그들은 존경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교황의 사냥개'(Spurhunde des Herren)라고 부르기도 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가장 강력한 대적이었다. 당시 추기경 카예탄, 잉골스타트의 신학교수 에크, 그리고 면죄부 설교자 텟젤 등은 루터와 가장 직접적으로 대치한 도미니크 수도회 사람들이었다.

종교개혁 여파로 개신교회가 설립되고, 이에 자극받아 1534년 가톨릭 자체 내의 개혁운동으로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파리대학에서 예수회(Jesuit)를 창설한 후(이것을 count-reformation 즉, 반-종교개혁이라고 부른다) 도미니크회의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금 주로 학문적인 분야에서 그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오늘날 도미니크 설교자 수도회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비유럽국가들에 산재한다. 현재 한국에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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