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희 목사(서울신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이 성가의 작사가로 잘 알려진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St. Francesco of Assisi, 1182~1226)는 부유한 직물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패기 넘치고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22세 때, 이웃 도시 페루지아와의 전쟁에 기사로 출정했다가 1년 동안 포로생활 후 귀환한 그는 자주 하나님과 인생에 대해 고민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교외를 산책하던 중 일생을 전환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한센씨병 환자가 구걸하러 오는 것을 보고 말머리를 돌려 피했다. 그런데, 말머리를 잡고 뒤돌아 선 그의 양심이 요동쳤다. 그는 즉시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에서 내린 그는 가련한 그를 부둥켜안고 용서를 구했다. 눈물을 흘리며 입을 맞추고 값진 외투를 벗어 주었다.

23세 때인 어느 날, 산 다미아노 교회 강단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음성이 들려왔다. “프란체스코야! 가서 내 집을 세워라, 내 집이 무너져가고 있다." 이 체험 후 그의 모든 것이 변했다. 아들을 힐난하는 아버지 앞에 옷을 모두 벗어 놓고, “나는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한 후 방랑길로 들어섰다.

그를 결단케 한 것은 1209년 교회에서 낭독된 말씀이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 10:5~14). 방랑과 청빈, 곧 예수의 길을 따르려는 프란체스코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부자들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공공연히 말해지던 시절에 그의 결단과 삶은 혁명적 행동이었다.

‘작은 형제회’를 조직한 그는 수도회 인가를 받기 위해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를 찾아갔다. 그러나 교황은 누더기를 걸치고 온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디서 돼지 냄새가 나는군! 아! 자네에게선가? 돼지우리에 가서 한번 더 뒹굴고 오면 또 모르겠네”라고 건성으로 말했다.

프란체스코는 즉시 돼지우리로 가서 한바탕 뒹굴고 돌아왔다. 교황은 수도회 창설을 윤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은둔을 택하지 않고, 삶에서 함께 하는 탁발(托鉢)수도 및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 프란체스코의 선교여정은 시리아, 스페인, 근동지방, 아시아에까지 미쳤다. 45세에 생을 마감한 그는 고향 아시시의 성 지오르지오교회에 안치되었다.

그는 생전에 해발 1300m나 되는 베르나 산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다. “주여, 주께서 겪으셨던 그 고난을 저의 영혼과 몸으로 체험케 하시옵고, 주께서 희생의 제물로 저를 위해 죽으신 그 불타는 사랑을 저도 당신을 향해 갖게 하옵소서" 40일 동안의 힘겹고 고독한 기도가 끝나가던 어느 날 새벽, 동이 트기 직전, 그는 스랍(Seraphim)이 여섯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 날개 한가운데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 때 프란체스코의 손과 발목, 옆구리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고통의 절정에서 프란체스코의 영성은 주님 곁으로 상승되었다. 그의 손과 발, 옆구리에 생긴 성흔(聖痕)에서 피가 흘렀고, 얼마 후 눈도 실명(失明)했다. 실명한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전부여!”(Deus meus, et omnia).

그는 이제 이 세상 연락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만 보게 된 것이다. 실로 주님은 프란체스코의 모든 것이 되었으며 그 자신 역시 주님의 것이었다. 주님의 세계에서 주님과 교제하며, 자기를 비우는 청빈의 삶을 통해 부요케 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또한 증거했다. 찬송가 중, “온 천하만물 우러러"는 새들과 노래하며 들짐승과 이야기하던 프란체스코의 영성이 담긴 노래이다.

세상의 옷을 벗음으로 주님의 세계에서 살았던 그, 모든 것을 버림으로 낙원을 찾은 사람, 가장 가난해짐으로서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를 만난 성자, 그가 바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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