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희 목사(서울신대)
주후 313년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와 공동으로 기독교 관용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320년에 리키니우스가 돌변하여 카파도키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배교령을 내렸다. 그때 세비스테아(지금의 터키 Sivas)에 주둔해 있던 병사 중 40명이 이교의 신에게 제사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지역의 총독 아그리콜라우스는 그들을 즉시 잡아들였다. 총독은 그들의 절개를 꺾기 위해 기발한 고문을 고안했다. 당시는 도시 밖에 있던 호수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3월경이었다.

총독은 호수의 얼음을 깨고 40개의 구덩이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40명의 옷을 모두 벗긴 후 그곳에 집어넣고 배교를 강요했다. 호수 밖에는 장작을 쌓고 불을 지폈다. 타오르는 장작더미 옆에는 이교의 신을 위한 제단을 마련하고 그 옆에는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욕조를 놓아두었다.

총독은 이 고집스러운 병사들도 결국은 추위를 이기지 못해 배교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병사들은 꽁꽁 언 입술로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여, 저희 40명은 생명의 면류관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 거룩한 수는 변함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3일 동안이나 그 지독한 추위를 견뎌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이 그만 신앙을 버리고 뛰쳐나와 이교 제단에서 희생제물을 바쳤다. 그에게는 배교의 대가로 따뜻한 물이 채워진 욕조가 허락되었다. 그러나 그는 상으로 받은 그 욕조 안에서 곧바로 죽고 말았다. 오랫동안 추위에 노출되어 얼었던 몸이 따뜻한 물에 닿자 쇼크를 일으키고 만 것이다.

39명의 병사들은 동료가 배교하자 깊은 슬픔을 가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이교도 병사 중 한 명이 모닥불 곁에서 불을 쬐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는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한 신비한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서 얼어 죽어 가는 병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천사장이 내려와 이 장엄한 인내자들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병사는 그 면류관을 쓴 병사들의 수를 세어보았다. 모두 39명이었다.

잠에서 깬 병사는 배교한 후 죽음을 맞이한 40번째 병사를 돌아보았다. 그 병사는 이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꿈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병사는 재빨리 자신의 옷을 벗어던지고 벅찬 감격으로 소리쳤다. “나도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그는 배교한 병사가 뛰쳐 나왔던 그 자리로 뛰어들었다. 그는 비록 물세례는 받지 못했지만 ‘보혈의 세례'를 받고자 자기 몸을 던진 것이다. 이리하여 순교자의 수는 정확히 40명으로 채워졌다.

3일이 더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몇 명의 병사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총독은 살아 있는 병사들의 팔다리를 모두 잘라 죽이고 불에 태워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군대는 십대 소년이었던 멜리토(Melito)만은 남겨두었다. 그들은 이 소년 병사가 비록 살아서 도망치더라도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팔다리를 자르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쳤다.

병사들이 떠난 후 멜리토의 어머니가 죽어 가는 아들에게 달려왔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고통은 곧 끝날 거야. 이제 넌 너를 위해 준비된 영광스러운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란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을 격려하며 속삭여 주는 동안 멜리토는 40번째 순교자로서 승리의 면류관을 썼다.

이 장엄한 집단순교사건 후 동서 로마제국의 단독 지배권을 놓고 아드리아노플(지금의 터키 Edirne)과 크리소폴리스(지금의 터키 Uskudar)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324년에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 군에 생포된 후 박해가 중지되었다. 리키니우스는 325년에 반란혐의로 테살로니카(지금의 그리스 Thessaloniki)에서 처형되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