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희 목사(기둥교회)
중세 교회 다시 보기사람들은 흔히 중세는 암흑기이고 중세 교회는 타락된 교회라고 말한다. 과연 그러할까? 물론 중세후기의 교회는 그러했다. 그러나 중세 전체를 놓고 볼 때 이런 시각은 지나치게 부정적인 태도로 경도되었다. 그렇다면 중세 교회를 보는 정당한 태도는 무엇일까?

첫째, 중세의 교회는 오늘의 교회와 고대의 신앙을 이어주는 가교였다. 사도시대와 속사도시대 그리고 교부시대의 신앙과 신학은 중세라는 그릇에 담기고 정제되었으며, 그것들은 중세라는 통로를 거쳐 개혁자에게 이르렀다.

둘째, 오늘의 교회제도, 성무일과, 예배형식 등은 중세 교회에서 구체적이고도 완전한 틀을 갖췄다. 고대가 기독론의 시대였다면 중세는 교회론의 시대였다. 중세의 교회는 오늘의 교회적 삶의 형식을 조성한 프레임 역할을 했다.

셋째, 중세에 이르러 신학의 깊이와 영역이 심화되고 확대되었다. 고대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있었다면, 중세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있었다. 고대에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설교가 있었다면, 중세에는 클레르보의 버나드가 있었다. 고대에 성 안토니의 청빈과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헌신이 있었다면, 중세에는 프란체스코의 청빈과 헌신이 있었다.

넷째, 교회의 타락은 산상수훈적 삶을 동경하게 함으로써 발도파나 토마스 아 켐피스 같은 민중경건운동을 등장케 했고, 그들의 정신은 교회개혁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그렇지만 교회의 제도적 측면 강화는 일면 긍정적인 면도 있었으나, 제도화가 심화될수록 교회에는 세속적 권력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요소들이 들어왔고 급기야는 자격 없는 자들에게 성직을 줌으로써 교회의 교회다움을 파기하는 혼란을 가져 왔다.

사실 종교개혁의 원인이 된 면죄부 역시 그런 것 중 하나였다. 또한 제정일치의 기독교국가에서 신앙적 순수성과 열심이 줄어든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태어나면 바로 신자로 인정되었던 종교·사회적 환경은 개개인의 영성에는 치명적이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면들을 극복하고 바른 신앙과 삶을 위해 발도파 운동과 민중경건운동 등이 일어났으며, 수많은 수도회가 등장했다.

‘기독교인'이라는 신분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과 그 고백에 바탕을 둔 삶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 안의 신자로 머물러 있지 않고, 기꺼이 교회 밖의 가난한 삶으로 나아갔다. 그곳이야말로 산상수훈이 선포되는 자리였으며, 복음이 현장화되는 곳이었다.

중세 교회의 가치는,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과정이요 통로였다는 점과 마치 고운 가루를 얻기 위해 사용되는 체처럼 신앙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시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국의 교회가 중세의 타락했던 일부 시기의 교회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개혁된 교회가 오히려 개혁 이전을 답습하는 아이러니는 어찌된 노릇인가? 중세를 매도한다고 해서 자기 신앙이 순수해지는 것도 아니며, 폄훼한다고 해서 모두가 개혁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형화를 추구하고, 안락함을 추구하는 면에서 그러하며, 목사들의 끝 갈 데 없는 명예욕과 신자들의 형식적 신앙생활은 중세 말 교회와 본질상 동일하다.

오늘 우리는 복음의 본질적인 면보다 예배당 치장과 대형화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는가? 대형 교회로의 수평이동은 달콤하고 안락한 ‘영광의 신학'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다. 교회의 본질은 보화를 창고에 들이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내놓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반달족의 약탈로 백성이 곤궁해졌을 때 화려한 성물을 팔아 구제했다. 내용을 위해 형식을 버릴 수는 있어도 형식을 지키기 위해 내용이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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