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희 목사(서울신대)
기독교 초기 로마의 박해는 크게 둘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 AD 64~239년이 일부 지역의 ‘국지적 박해' 시기였다면, 239년~313은 제국 전체를 관통하는 ‘전반적 박해'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전기 박해는 AD 64년 네로 황제는 로마시의 3분의 1 정도가 화재로 불타자 방화의 주범을 기독교인들로 지목하고 박해했다. 트라야누스 황제(Traianus, 98~117) 때는 국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비밀 결사 조직을 엄중하게 다스렸는데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조직원으로 오해를 받았다. 전기 박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121~180) 이후 정권이 약화됨에 따라 점차 줄어들었다.

후기 박해는 249년 데키우스(Decius)가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로마 전역에서 신들을 위한 제사를 강요하고 제사증서(Libellus)를 발행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우상에 제사하는 행위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하여 데키우스에게 기독교인들은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는 자들로 간주되었다. 데키우스의 박해로 대도시의 감독들과 성도들이 순교하거나 추방되었다.

박해는 260년 갈리에누스(Gallienus)가 황제가 되었을 때에 종식되는 듯했다. 그는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 박해 때 몰수했던 교회 재산을 돌려주었으며 각처에 예배당 재건을 허락했다. 기독교인 중에 군대의 장교나 지방관리가 되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 통치기에 강력한 박해가 제국을 휩쓸었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던 그는 4차에 걸친 칙령 선포로 기독교 말살을 획책했다. 1차 칙령으로 인해 예배당이 파괴되었고, 성서가 불태워졌다. 2차 칙령으로 교회의 직임자들이 대거 투옥되었고. 3차 칙령으로 투옥된 신자들에게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할 것을 강요하며 박해했다. 305년 4차 칙령은 단순히 기독교 신자임을 고백하는 자들도 처형했다.

305년에 갈레리우스(Galerius)가 황제가 된 후에도 박해는 지속되었으나 몸이 썩어가는 질병으로 죽어 가면서 311년에 니코메디아에서 관용령을 반포함으로써 박해가 중지되었다.

당시에 로마는 동서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동쪽을 다스리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4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하여 유명한 십자가 환상을 본 후 서쪽을 다스리던 막센티우스(Maxentius)의 19만 군대와 밀비안(Milvian) 다리 전투에서 승리하고 제국을 통일했다.

313년에 밀라노 칙령(Edictum Mediolanense)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제국의 다른 종교들과 같이 공인된 하나의 종교로 인정하고 강탈된 교회 자산을 돌려주고 예배 자유를 허용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하나의 제국, 하나의 법률, 하나의 시민, 하나의 종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는데, 기독교 신앙을 제국의 정신을 통일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으로 여겼다. 

이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가 391년과 392년에 잇달아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제국의 유일한 종교 즉, 국교로 선포하고 다른 종교들을 금지함으로써, 기독교는 박해받는 변방의 종교에서 제국의 중심 종교요 유일한 종교로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