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십자가 처형은 페르시아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제가 이집트와 카르타고에서 사용했다. 이전에는 십자가 처형이 로마인들에게서 성행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카르타고인들로부터 도입했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이었으며 동시에 수치의 형벌이었다. 아주 서서히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게 하는 가장 무자비하고 잔인한 형벌의 극치로서 대개는 반란 노예나 모반죄를 지은 자들 그리고 아주 중대한 죄를 지은 자들과 탈영한 군인들에게 가해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처형법은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고 역할도 했다. 로마 시민에게는 십자가 처형은 물론이고 채찍질도 가할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노예들이 받는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헤로도투스의 ‘알렉산더의 역사’에 따르면 성경에도 언급된 다리우스 왕은 기원전 519년에 3000명이나 되는 바빌로니아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또한 후에 알렉산더 대제가 정복지에서 십자가 처형법을 사용했다. 이 책에 기록된 루푸스(Curtius Rufus)의 말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두로를 정복한 후 2000명을 이 방법으로 처형했다. 로마가 헬라제국을 점령해 가면서 카르타고의 처형 관습도 자연히 도입되었는데 인도, 아시리아, 시리아 그리고 켈트족 등의 이방인들에게 이 형벌을 사용했다. 헹겔(Martin Hengel)에 따르면 이 방법은 후에 게르만족과 영국인들도 사용했다.

로마의 키케로(Cicero)는 이 처형을 보고 “가장 잔인하며 혐오스러운 형벌”이며 “최고의 형벌”이라고 한 바 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또한 이 처형을 직접 보고 “가장 지독한 죽음”이라고 했다. 로마의 법학자 파울루스(Julius Paulus)는 이 당시의 처형법들 즉 화형이나 목을 베는 것이나 짐승들에게 던져지는 것보다 “십자가 처형이 가장 최악의 것”이라고 했고 세네카는 “이 처형이 가장 특별한 방법이었다”고 설명했다.

스파르타쿠스에서 노예 폭동이 일어났을 때 로마 장군 크라수스는 6000명의 노예를 로마로 들여오는 길목인 아피온 거리에서 십자가로 처형함으로써 경고로 삼았다. 요세푸스는 서기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Titus)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때에 하루에 500명 이상이 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었다고 기록하면서 “예루살렘에는 십자가를 세울 곳이 더는 없고 사용할 십자가가 부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기에 페르시아에서 대개 처형 대상자의 발은 땅에서 1피트 정도 들어올려져 나무에 묶이거나 기둥에 못 박혔다. 그 이후에는 십자가 형태가 사용되었는데 기둥을 세워 놓고 수평으로 된 나무에 묶이거나 못에 박힌 채 들어올려져 기둥에 고정되었다. 로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T자 형태의 타우크로스를 주로 사용했고 라틴크로스의 형태 혹은 X자 형태의 십자가 처형도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타우크로스일 개연성이 크다.

처형 대상자는 채찍질이 끝난 후 성벽 밖 기둥이 세워진 처형장으로 백부장이 이끄는 병사들에 둘러싸여 자기가 못 박힐 수평 통나무를 지고 가야만 했다. 세워진 기둥은 136kg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것이었다. 죄수가 지고 가는 통나무는 35~57kg의 무게였다고 한다. 이것을 채찍질로 다 해어진 어깨에 지고 가는 죽음의 길은 고통의 길 그 자체였을 것이다. 죄목을 쓰는 현판은 때때로 병사들이나 주위에 있는 다른 죄수가 운반했고 기둥 꼭대기에 게시되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처형장은 예루살렘 성벽 밖의 골고다처럼 로마의 에스쿠빌리누스(Esqulinus)라는 곳에도 있었다고 한다. 처형 장소 근처에는 주검을 던져놓는 곳이 있었는데 그런 까닭에 ‘골고다’를 ‘해골을 두는 곳’이라고 불렀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