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좋아하는 믿음의 친구가 있다. 그는 예배 중 설교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적 이론에 사로잡혀 설교를 평판하기가 일쑤다. 그는 가끔 예배 중 설교가 모든 사람의 입맞에 잘 맞게 만들어낼 목적으로 준비한 설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때론 오직 말씀중심적 설교여야 한다고 강론할 때도 있다.

우린 모든 매체를 통해서 많은 설교자의 유형을 보아왔다. 그러한 유형은 여러 가지 설교형태에 대한 다양성으로 나타났고 목회자나 평신도들로부터 이런저런 평판을 받기도 한다. 그것은 목회자들 입장에선 성경적 설교만으로는 현실을 따라잡기 힘들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 달 전 나는 북유럽 러시아, 스웨덴, 핀란드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옛 제정러시아 수도 레닌그라드)에 도착하여 3일간 머물면서 마린스키극장에서 차이콥스키 발레 “호두까기 인형”과 쇼스타코비치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ievitch Rachmaninoff,1873-1943) 교향곡 제3번을 듣는 기회가 있었다.

라흐마니노프가 성공적으로 작곡했다고 자부하는 교향곡 제3번을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실패작이라고 했다. 반면에 라흐마니노프가 스스로 실패했다고 인정한 제1번 교향곡은 모든 러시아인들이 교향곡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곡이며 ‘러시아교향곡’이라고 찬사를 보낸 곡이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자신이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제1교향곡을 1897년 성 피터스버그에서 초연했을 때 그는 자신의 곡을 듣고 다시는 연주하길 거부하고 악보를 찢었다고 한다. 제1번을 자신은 실패작이라 했지만 대중은 좋아했다

반면 자신이 좋다고 한 제3번은 대중이 냉혹한 비평을 한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해답은 간단하다. 그는 그의 제1교향곡은 순수음악에 접근하는 음악기법적 완숙성과 예술성의 가치 즉, 작품이 주는 흡인력이 결여되었고 오케스트레이션에서 더는 기대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 단정 지은 것이다.

우리는 예술성의 객관성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술성의 객관성은 작곡자의 의도와 성취에 관계없이 대중이 싫으면 그만이다. 특히, 러시아의 대중은 민족적이고 슬라브적인 색채에 향수가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그런 공감형성도엔 관심없이 그저 작품형식에만 몰입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향곡 제1번이 대중에게 더 어필되는 것은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제1악장 서주와 제4악장 중에 있는 브라스(Brass)의 강렬한 색채일 것이다.

설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도의 영성과 수준에 맞지 않는 설교는 평판의 도마 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보니 성도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소심한 목회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와 교향곡을 비교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지만 요즘 성도들의 귀와 입은 마치 걸러내는 체와 같아 자기 식성에 맞으면 “아멘”하고 식성에 맞지 않으면 평판을 한다.

설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하는 메시지이지 평판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듣기 싫은 설교도 강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의 저자 존 맥아더(John MacArthur)가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지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말과 같이 수많은 목회자들이 강조해온 하나님의 말씀은 가끔 그렇게 듣기 좋은 취향으로 난도질 당하기 일쑤이다.

존 맥아더는 오늘의 교회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주요 경향, 즉 심리학, 실용주의, 신비주의는 바야흐로 신영지주의가 득세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라고 지적하며 위험한 사례들로 꼽고 있다.

평신도로서 목회자의 설교가 어떠하다는 평판을 하는 성도들의 대부분은 이성적이고 비판의식이 강해 영성의 자람이 없고 늘 불평과 불만에 젖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처럼 예술세계의 아집은 시대가 흐르고 공감대가 형성되면 다시 무대에 올려놓고 나처럼 동양 저쪽 끝 한국에서 온 사람에게도 감동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친구야! 설교를 음악 감상하듯 듣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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