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지방 안디옥의 주교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주후 30~35년에 태어났다. 그의 칠십여 평생은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에 의해 잉태된 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전설에 의하면,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무릎에 앉히고 축복하셨던 그 어린아이가 바로 이그나티우스였다고 한다. 2세기 기독교 사회에서 이그나티우스에 대한 존경과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짐작게 하는 이야기이다.

폴리갑, 이레니우스, 유세비우스 그리고 제롬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주후 108년경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로마로 압송되던 중 서머나에서 자신을 위해 구명운동을 하고 있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이 더는 나의 몸을 보지 못할 그때, 나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이라며 자신을 위한 구명활동을 하지 말라고 편지했다.

이그나티우스에게 순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이하,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2:1),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게 기울어가는 것’이며(2:2), ‘기독교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며(3:2),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며(4:2), ‘그리스도에게 이르도록 하는 것’이며(5:3),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며(6:2),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6:2), ‘하나님의 고난의 모방자’(6:3)가 되는 유일한 길이었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셨고 이 복음은 순교의 피로 지켜졌다. 순교는 이교도들을 향한 가장 확실한 변증이었다. 그들에게 순교는 그리스도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새롭고 영원한 삶으로의 비약이었다. 배교가 곧 이 땅에서의 생명을 보전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때에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와 성도들은 순교를 통하여 얻는 영원한 나라에서의 생명을 기꺼이 열망했다.

우리는 야수처럼 달려드는 현실 앞에서 애써 태연해 하려 하지만 우리의 유전된 부패성은 결코 우리를 놓아두지 않는다. 토인비는 좋은 말로 역사를 가리켜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 하였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싸움의 날들이라 해도 옳을 듯싶다. 개인이든 사회든, 나라든 간에 이 싸움은 소유를 위한 집착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마 4:22, 눅 5:11), 자기를 향한 집착을 버리고 예수를 쫓으라 한다. 이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며 예수를 모방하는 삶이다. 범상한 우리에게는 이것이 시지프스의 신화같이 여겨지지만 신앙의 선배들의 족적은 우리를 고무하기에 충분하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를 철저히 버린 신앙의 위대한 스승이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과 구속의 일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고 하셨는데, 이그나티우스는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순수한 빵’이 되는 길은 ‘야수의 이빨에 의해 갈아지는’, ‘하나님의 밀’이 될 때라고 말했다.

피의 순교시대를 벗어난 오늘 우리에게 ‘한 알의 밀’이 되는 길은 피 없는 순교를 향한 열망이다. 자신을 부수고 썩혀 자기 존재가 사라질 때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음같이 오늘날 ‘그리스도인 되기’는 “세상이 더는 나의 몸을 보지 못할 그때,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이라는 이그나티우스의 말에서 힌트를 얻는다.

오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제자의 길을 간다는 것의 참 의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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