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니콜라스(St. Nicholas, ?~345/352)는 300년경 터키 남서부에 있는 파타라(Patara)라는 곳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파타라는 로마시대에 특별히 번영한 도시였다. 이 도시의 잔해는 지금도 남아있어 당시의 번영을 알려준다.

니콜라스는 젊었을 때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서 수도생활을 했고 후에 지중해 연안 터키에 있는 안탈리아(Antalya) 서쪽에 위치했던 미라(Myra)의 주교가 되었다. 미라의 주교로 있을 때 그의 명성은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지역) 전역에 널리 퍼졌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기에 투옥되었다가 콘스탄티누스가 집권한 후 석방되어 고대교회 최초의 공의회로서 아리우스주의를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립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도 참석했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345년 혹은 352년에 그가 죽은 후 그를 기려 콘스탄티노풀에 교회를 세웠다. 미라에 있던 그의 유해는 1087년에 이탈리아인 상인이 도굴하여 이탈리아에 있는 바리(Bari)라는 곳에 옮겨 놓았다.

니콜라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미라 지역에 기아가 극심했을 때, 어떤 푸줏간 주인이 세 명의 어린이들을 살해하여 고기처럼 팔아먹을 심산으로 큰 소금 통에 가둬 두었다. 꿈에 천사로부터 이 엄청난 사실을 전해들은 니콜라스는 급히 푸줏간 주인의 집으로 달려가 아이들을 구해 주었다. 이런 일화로 니콜라스는 어린이들의 수호 성인으로 여겨진다.

또 다른 일화로 한 소녀가 혼수품을 구할 돈이 없어 자기 몸을 팔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그는 몰래 금이 든 자루 세 개를 소녀의 집 마당에 던져두었다. 소녀는 이 돈으로 혼수를 장만하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또 한 마을에 아주 가난한 부모와 세 딸이 있었다. 세 딸이 적령기가 되어 결혼하려 했으나 너무나 가난한 부모는 결혼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서 애를 태우다가 그나마 있는 허름한 집이라도 팔아 혼례를 치르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스가 어느 날 밤 몰래 지붕 위로 올라가 굴뚝을 통해 집안으로 금화를 던져 넣었다. 금화는 마침 화덕에 걸어놓은 처녀들의 양말 속으로 들어갔고, 날이 밝은 후 처녀들은 빨래를 걷다가 그 속에 금화가 묵직하게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일은 다음 날에도 계속되었다. 이들 금화는 딸들이 혼례를 치를 수 있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이틀 동안이나 계속된 일에 너무나 감사한 아버지가 도움을 준 사람을 알고 싶어했다. 셋째 날 밤 아버지는 누가 금화를 던지고 가는지를 알고 싶어 화덕 안에 숨어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굴뚝에서 무언가 툭하고 떨어져 아버지의 머리를 때렸다. 화덕에서 급히 나와 지붕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묵직한 자루를 옆에 끼고 앉아 굴뚝 속으로 금화를 던지고 있는 주교 니콜라스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양말에 선물을 넣어 어린이의 머리맡에나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 놓아두는 관습, 성탄절이면 굴뚝을 타고 들어와 선물을 놓고 간다는 산타클로스의 이야기는 미라의 주교, 성 니콜라스라는 실제 모델에서 유래한 것이다.

2013년 성탄절,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린다. 그러나 묻고 싶다. 탐욕과 이기로 오염되어 예수님께 내어드릴 방이 없는 것은 아닌가? 명예와 소유의 포만감에 젖어 구세주를 예배당 문 밖으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는가? 타락한 문명에 취해 한없이 흔들리는 오늘의 교회 문 밖에서 서성이고 계시는 예수님의 기척을 알아채기에는 예배당 문이 너무나 육중하게 닫혀 있는 것은 아닌가?

이번 성탄절에는 누군가의 담장 너머로 던져줄 사랑 한 자루를 준비하자. 성탄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던져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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