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아픈 만큼 더 반짝이리라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속이 쓰려 몇 번이고 배를 쓸어내린다. 심한 날엔 음식을 삼키지 못해 물 몇 모금으로 하루를 견딜 때도 있다. 자꾸만 체력이 약해지고 있다. 힘이 빠지는 만큼 마음도 약해지는 것인지 매사에 의욕이 없을 때도 있다. 할 일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교인들에게 아프다는 내색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더 힘든 것인지 모르겠다. 목회자의 병약함이 혹시나 복음의 장애가 되거나, 남 얘기로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의 흥미로운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께서 내가 에베소에 남아 아직은 견고하지 못한 교회를 돌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입으로는 그분의 말씀에 기꺼이 따르겠다고 대답했지만 실은 실망과 두려움이 마음 한 구석에서 움을 트고 있었다.

스승과 더는 동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망스러웠다. 스승의 빈자리를 온 몸으로 체험하며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내가 한 교회를 목회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두렵기도 했다.

타고난 기질도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교육 탓에 온유한 태도야말로 신앙의 가장 분명한 실천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교회에 남아 목회를 시작하면서 난 그런 나의 기질과 태도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주저하게 만들거나 우유부단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우유부단함 때문에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그렇다고 목회자인 내가 내 젊은 힘을 과시하듯 고함을 지르며 대들거나 주먹다짐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저 내 탓이려니 자책하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지나친 무력감을 느낄 때도 있다.
그래서일까? 내 속이 자주 내 자신에게 분노하는 것은 과다하게 위액을 분비하면서 위벽을 깎아 내리거나 예리한 칼로 피부조직을 자르는 듯한 찢어지는 아픔으로 자신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고는 한다. 그럴 때면 그저 손으로 쓰린 배를 쓰다듬으며 자꾸 다독이는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바울 사도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혼자 남겨 놓은 내가 마음에 걸리셨는지 이곳저곳에 나를 염려하는 진심을 흘려놓으신 그분의 편지를 읽다가 난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그분이 내 속병을 걱정하며 포도주를 써보라고 권면하신 대목에서 말이다.

그분의 글은 순간 주님의 피 묻은 손이 되어 내 속을 만지고 있었다. 목이 다 쉬도록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내 울음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지금은 아프고 눈물 흘리지만 때가 차면 그 아픔과 눈물이 내 안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되리라는 음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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