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축복은 부모에게 있다

청문회는 이제 국가 고위 관리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되었다. 내정자들의 통장 잔액과 거래 내역에 대한 질문은 예외 없이 등장하고 있으며 대부분 국민을 화나게 하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의 윤리적 문제를 일삼는 것은 아마도 군복무일 것이다. 내정자들의 아들들은 대부분 교묘히 피해간 흔적들이 드러나곤 한다. 어느 부모가 추위와 더위에 아들을 군대로 내몰고 싶으며, 어느 부모가 자식의 청춘 중 2년의 기간을 군대에서 보내게 하고 싶을까? 

자식 사랑이 유독하다는 대한민국만큼이나 이스라엘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기대 역시 크다. 유대인의 교육 방식을 배우고자 하는 강좌들이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는 것만을 봐서도 이는 쉽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자식의 삶과 미래에 대한 기대는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자녀들의 이름은 대부분 어머니에 의해 정해진다. 식물이나 꽃의 이름을 따서 부르거나 할아버지나 할머니 같은 조상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출산 당시 상황을 대변해주는 경우가 많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들의 한을 담듯, 사라는 이삭을 통해 웃음을 갖게 되었고(창 17:19) 한나는 기도를 통해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는데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삼상 1:20). 레아와 라헬 사이의 자식에 대한 간구는 자식들마다 독특한 이름을 갖게 했다. 예를 들어 레아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첫 아들의 이름을 ‘보라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르우벤이라 지었으며 ‘들으심’이라는 의미의 시므온, ‘연합함’이라는 의미의 레위, 네 번째 아들을 갖고 이제 여호와를 ‘찬송하리라’는 의미로 유다라고 이름지었다(창 29:32~35).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름들이 어머니의 신앙고백과 같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여호와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담긴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는 분명 어머니의 신앙적 교육 안에서 자랐을 것이며 여호와의 축복 속에 사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리라는 것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때로 아이들의 이름에는 히브리어 철자 중 여호와의 이름에 들어가는 ‘요드, 헤이, 바브, 헤이’나 혹은 신이라는 뜻의 ‘엘’을 넣어 자녀들의 삶 속에 여호와의 보호와 임재를 염원하기도 했다. 우리가 익숙하게 부르고 있는 이사야라든가, 예레미야, 히스기야, 엘리야, 엘리사 등은 원어로는 이사야후. 예레미야후, 히스기야후, 엘리야후, 엘리사후로 히브리어 ‘요드, 헤이, 바브’를 넣은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간 예이다. 이는 우리가 자녀들의 이름에 예자를 넣어 예수의 삶을 닮아가기를 기도하는 것과 같다.

지난호에서도 언급했던 개인의 인장이라든가 인장이 찍힌 불라와 이름이 적혀 있는 토기조각들에서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개명에 관련된 관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남왕국 유다 특별히 바빌론의 파괴로 불에 탄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51개의 불라(그림)에는 ‘야후’와 ‘엘’이 들어간 많은 이름이 발견된다. 그러나 북왕국 이스라엘 아합의 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사마리아에서 발견된 토기조각에 기록된 이름들은 대부분 ‘바알’이라는 호칭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는 남왕국 유다의 부모들이 여호와를 향한 신앙 아래서 자녀를 낳고 키운 데 비해 북왕국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바알의 축복으로 키운 아이들은 바알의 자녀로 자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녀의 축복과 미래는 부모의 신앙에서 시작된다. 내가 여호와 앞에 바른 신앙을 가지고 내 자녀를 키워갈 때 그 아이의 미래는 여호와와 함께할 것이다. 내가 잘못 전달한 세상적 축복은 때론 아이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 불행의 씨앗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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