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푸스(본명 요셉 벤 마티아스)는 예수의 활동시기 몇 해 후 유대 땅을 로마가 점령하고 있었던 주후 37년, 예루살렘의 제사장 가문인 마티아스(Matthias)와 왕족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갈릴리 근처에서 젤롯당(Zealots)과 시카리파(Sicarians)로 불리는 민족주의 그룹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혁명가로서 동참하여,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의 지휘를 받고 있던 로마 군대 주둔지 근처인 감라(Gamla)에 저항 조직을 건설했다. 그러나 인근에는 이미 기샬라의 요한이 개인적으로 시민군을 조직해 놓고 있었다.

두 지도자는 서로 간의 불화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로마군과 싸우기보다는 서로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따라서 로마군의 첫째 공격목표인 세포리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그들은 67년에 세포리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당했고, 요세파타에서 포위되었으며, 결국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항복했다. 항복한 요세푸스는 “당신은 요세푸스라는 유다인 하나를 포로로 잡았다고 생각하겠으나 이것은 당신에게 전언하도록 신이 나를 당신에게 보낸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하며 그가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간언했다.

요세푸스의 예언은 69년 7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로마 장군 티투스의 반년 가까이 걸린 예루살렘 포위 공격 종료 후 이뤄졌다. 12월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한 것이다. 그는 티투스의 보호와 신뢰 아래 그의 통역관으로서 그가 유대 민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력하고, 예루살렘의 봉기자들에게 투항을 설득했다. 이리하여 이전에 유대인 사령관이었던 요세푸스는 플라비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티투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Titus Flavius Josephus)라는 로마식 이름을 얻었다. 그 후 그는 왕정에서 고대사와 유대전쟁사 등을 썼다. 요세푸스는 변절한 유대인으로서 역시 그리스도인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로마의 역사가로서 역사적 사실들을 기술했다.

요세푸스는 그의 저작에서 단 두 번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했다. 첫번째 언급은 “그 당시에 예수라고 불리는 한 현인이 있었다… 빌라도는 그를 재판했고 사형을 선고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후 다시 살아나 자기들에게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아마도 예언자들이 계속적으로 말하여 온 메시아인지도 모른다"(고대사 18권 3장 3절)라는 내용이고, 두번째 언급은 “안나누스가 재판을 위해 산헤드린을 소집했고 그들 앞에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와 다른 자들을 데려왔다"(고대사 20권 9장 1절)라는 내용이다.

요세푸스가 예수님의 탄생과 활동을 연대를 제시하여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첫 번째 글을 통해 예수님의 활동 시기를 대략 알 수 있다. 그는 고대사 18권 3장 1절에서 빌라도가 황제의 흉상이 그려진 깃발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와 유대인들의 반항에 직면했고, 2절에서 성전의 기금으로 수로공사를 해서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3절 초두에 있는 ‘그 당시에’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사건들이 있던 때를 말한다. 따라서 적어도 요세푸스에게서 예수님의 출현 연대에 대한 정확한 연대기적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고 해도 그의 글을 통해 예수님의 실존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얻을 수 있다.

예수의 실존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성서 외적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예수와 예수운동에 대한 기독교권역 밖의 언급은 예수의 실존을 신화라고 주장하며 근거 제시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반증할 수 있는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결정적 증거이다. 예수는 신화가 아니다. 예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분명한 역사이며 실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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