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동네 한 쪽에 몇 그루 무화과나무가 서 있는 그곳이 내가 가장 즐겨 찾는 장소였다. 나무가 만들어 주는 시원한 그늘에 앉아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느 날 살랑거리는 바람에 춤을 추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만들어 입은 것이 다름 아닌 무화과 나뭇잎이었음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들이 그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릴 수 없었다는 것도 말이다.

한참을 더 바라보며 생각을 하다가 어쩌면 내 자신이 바로 저 무화과 나뭇잎과 같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어려서부터 경건한 신앙인으로 훈련 받으며 자라서 지금은 누가 봐도 인정해줄 수밖에 없는 참된 신앙을 소유했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옷을 만들어 입은 무화과 나뭇잎처럼 내가 참되다고 여기는 나의 신앙이 혹시 나의 죄와 수치를 가리려는 내 스스로의 노력의 결과라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빠지지 않고 제사를 드리고, 열심히 성경을 암송하며, 거르지 않고 금식을 하고,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는

의 모든 존경 받는 행위들이 혹여 내 구원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하려는 종교적 도구들은 아닐까?
늘 내게 주어진 모든 종교적 의무를 다했고, 종교가 정한 기준에 미달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내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목적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내 마음과 생각은 정죄하지 못하는 율법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해 내 안 깊숙이 감추어 놓은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내 종교를 만족시키는 일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왔지만 사실 가만히 돌아보면 난 감추어진 내 죄와 수치 때문에 가슴을 치며 아파한 적이 없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내 본성이 만들어 내는 추악한 생각과 의도들을 진정으로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아니 단 한 번도 내 존재를 회개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 어줍은 노력이 내 구원의 보장인 것처럼 누구보다 열심히 종교에 충성을 해 왔었던 것은 아닐까? 종교인이 곧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자기만족에 안주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질문들…. 하지만 난 전혀 답을 알지 못했다. 누군가 내게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를 고민했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같은 종교인이 아닌 내가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아뿐일 거라는 결론을 내릴 때였다. 멀리서 친구 빌립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는 달려오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나다나엘, 너무 기쁜 소식이 있어. 내가 그분을 만났어. 그분을 만났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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