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것 같더니 벌써 저물어가는 가을이 다가온 듯합니다. 예전 농촌에서는 모내기 때와 벼 베기 때가 온 동네 사람들이 총동원되는 가장 바쁜 시기였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농업이 기계화되면서 일이 훨씬 수월해졌기 때문입니다. 트랙터가 소 한 마리의 100배가 넘는 일을 하고, 콤바인 한 대가 사람의 100배의 일을 한다고 하니까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엘리사는 소 열두 겨리, 24마리의 소를 한결같이 부리며 밭을 갈았습니다. 옛날 소 한 마리를 길러 일 할 수 있게 길들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24마리의 소를 길들여 밭을 갈았습니다. 한 마리로 밭을 갈면서도 쩔쩔 매는데 24마리로 많은 쟁기 날을 달고 능수능란하게 밭을 갈게 하기까지는 얼마나 길들이기에 열심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이로써 엘리사는 엘리야의 뒤를 이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우상 숭배에 대항하여 여호와 신앙을 수호할 신앙의 전사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선지학교 생도들도 있었을 텐데 밭이나 갈고 농사나 짓는 엘리사를 지명하여 부르신 배경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실함입니다. 그는 열두 겨리로 밭을 가는데 열두째 소와 함께 있었습니다. 즉, 뒤에서 소를 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군대말로 하면 24마리의 소를 잘 길들여 지휘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소의 수를 왜 강조하셨을까요? 그의 환경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두 겨리를 부릴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물질적으로도 좋은 환경 가운데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쓰시는 자는 누굴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할 일 없는 한가한 자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입니다. 그런 자를 부르시고 쓰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부를 때도 그에게 맡겨진 아비의 양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맹수들과 싸우고 효율적으로 맹수들을 물리치기 위해 물매 던지기를 끊임없이 숙련하여 맹수를 물리쳐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맡기셨던 것입니다(삼상 16장, 17장).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마 4:18~22). 열심히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사는 망설임 없이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엘리야가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갔다”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그가 삶을 위해 쌓아놓았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엘리야에게 나갔다는 것은 후계자 지명에 아멘으로 나아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제자로 지명 받은 자들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눅 5:11).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자는 때로 물질과 그동안의 모든 기득권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마 19:16~21, 빌 3:8). 주님의 부름에는 어떤 전제조건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라고 하면서 조건이 붙지 않습니까? 현재와 미래에 대한 보장이 주어지지 않으면 망설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소명자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일과는 깨끗이 결별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한 겨리의 소를 잡아 백성들에게 먹게 하고 일어나 떠나 엘리야를 따랐다” 라고 했습니다. 소를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랐다는 것은 그의 직업은 농부였는데 농부 됨을 전적으로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의 부름을 보면서 하나님은 일상생활에서도 성실한 사람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모든 유산 및 기득권을 포기하고 고난에 대한 두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전적으로 부름에 헌신하고자 하는 자를 부르십니다. 이제 우리 또한 부름에 확신을 가지고 그 부름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소명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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