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순교자 178명·순교성지 7곳 달해

순수한 신앙을 가진 본 교단에서는 유난히 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됐다. 박명수 교수(서울신대)에 따르면, 한국성결교회의 순교자는 크게 세속화에 맞서 일어난 순교와 일제시대 때의 순교, 공산주의로 인한 순교로 나뉠 수 있다.

일제시대 당시 재림사상은 일본의 천황숭배와 정면으로 배치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공산주의로 인해 핍박을 받게 된 것이다. 또 세속화에 맞서 순결한 신앙을 고집했던 신앙의 선배들은 순교신앙을 이어가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

‘가시밭의 백합화’ 김동훈 전도사

1921년대 교단의 첫 순교자가 나왔다. 그 이름은 김동훈 전도사. 성서학원의 대부흥집회에서 중생의 은혜를 체험한 후 그는 조치원교회에 부임해 전도대를 조직,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 순교를 당했다. 요셉처럼 이성의 유혹을 물리치려다 억울하게 순교의 피를 흘렸다.

평소 김 전도사를 흠모하던 한 여인이 그를 유혹했으나 거절당하자 그의 남편에게 거짓말로 자신을 유혹했다고 이야기 해 그녀의 남편과 불량배들이 김 전도사를 폭행한 것이다. 김 전도사는 구타를 당한 후 치료를 받았으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결국에는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아내에게 “나는 이제 죽는 사람이나 내가 죽었다고 나를 구타한 사람들에 대하여 고소하는 일이 없길 바라오. 나의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내가 어찌 사람을 원망하겠소”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천황이냐 예수냐’ 박봉진 목사

박봉진 목사는 철원에서 재림신앙을 고수하다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그의 설교노트를 문제삼았다. 바로 “성결교회의 종말론이 일본의 패망을 강조하고 있으며 재림사상이 천황제도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이유였다.

박봉진 목사는 3개월에 걸쳐 감옥에서 심문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나온 박봉진 목사는 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끝까지 신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지 5일만에  “주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유언을 남기고 하나님의 품으로 떠났다.

‘복음의 씨암탉’ 문준경 전도사

섬 선교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도 교회와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다 순교했다. 6.25 전쟁 중에 그는 피난하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교회와 수양 딸 백정희 전도사를 지키려 증동리에 남아았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공산당은 문준경 전도사를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고 몰아세우며 단도와 죽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사살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사랑하는 딸은 제발 살려달라”고 부탁했고, 오히려 그들을 전도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집단으로 순교한 순교자들

성결교회에는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순교자들의 희생도 있었지만 함께 신앙을 지키다 집단적으로 순교를 당한 순교자들의 희생도 많았다.

충남 논산군 병촌교회에서 일어났던 66명의 순교사건, 이판일 장로를 비롯해 48명의 순교자를 낳았던 임자진리교회의 순교사건, 전북 정읍시 소성면 두암교회에서 희생된 윤임례 집사 등 23명의 순교자 등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신앙선배들의 헌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를 지키려다 순교한 고 임광호 전도사 등이 있으며, 납북자 순교자도 여럿 있다.

이런 순교신앙의 이야기는 과거에 있었던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오늘날 성결신앙의 뿌리로 남아 있다. 이번 순교자기념주일이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며 다시 한 번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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