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을 할 때 식당에서 사람 수 만큼 밥을 시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는 사람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밥을 남기는 손님이 많다 보니 그릇 크기가 작아졌고 그나마 밥도 적게 담는다. 밥이 천대 받는 세상이 되었다.

못 먹어 굶어 죽었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까마득하다. 가슴뼈가 앙상한 검은 대륙의 어린이가 배고파 징징대면서 야윈 엄마의 젖을 빠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러려니 한다. 북한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도 귓전으로 흘려보낸다.

지금처럼 복지의 화두가 인류에 회자한 때도 없었다. 복지라는 용어가 일상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라나 국민들의 살림형편이 좋아져서 나온 말이여서다. 복지의 고향 영국에서 ‘요람으로 무덤까지’란 말을 창안한 비버리지(Beveridge)경은 인간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사회 5대악 중 궁핍을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바로 빵 문제다. 사람의 욕구는 늘 높은 곳을 향한다. 밥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곳으로 마음의 눈을 돌린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즐기고 마시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찾는다. 다양한 문화와 만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간다. 물론 경제적 뒷받침은 필수적이다. 국민들의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 국가의 복지 프로그램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속에서 각축을 벌이면서 살아간다. 경쟁은 국가나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의 뿌리다. 경쟁의 주변에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탈락의 그림자가 늘 서성인다. 흔히 복지에서 말하는 사회부적응자다. 자유분방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큰 이슈는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에 대한 배려다. 사회보장제도나 사회복지서비스라는 장치가 바로 그거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라는 옛말이 있지만 지금은 국민 개개인의 가난을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문제는 가난의 기준이 뭐냐는 것이다. 국가가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의 바람을 해결하기 위해 최저생계비 또는 최저임금제를 마련하고 있지만 상징적이고 추상성이 짙다. 이런 틈새를 정치집단이나 정치인들이 교묘히 뚫고 들어온다. 표를 주면 빵 이상의 욕구를 다 해결해 주겠다는 선거용 약속을 내민다. 65세만 넘으면 누구에게나 매월 노인수당을 주고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 대학생 등록금 반값 등 입맛 당기는 상품을 내 걸고 유혹한다. 말대로 되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나라가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마련할라고.

결국은 국민들의 호주머니를 넘본다. 이를 법적으로 묶은 것이 세금이다. 내야 하는 세금의 종류도 엄청 많지만 월급쟁이 봉투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주 손쉽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봉급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머리회전이 빠른 흰 칼라 봉급쟁이들이 벌떼같이 덤벼드는 통에 한발 물러서 급한 불은 껐지만 펑크 난 복지자금 마련에 지금 대통령의 머리가 몹시 지근거리게 되었다.

우리보다 몇 배 잘 사는 유럽 몇몇 나라들이 복지 정책을 마구 뿌리다가 아주 된 서리를 맞고 있다. 욕을 얻어먹더라도 복지의 깊은 병 수렁에서 일찍 탈출한 선견자는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 정도다. 한번 약속하면 영구적이라는 복지의 두터운 벽을 허물면서 정부의 복지예산을 깎아버렸기 때문이다.

늦게나마 적정규모의 복지를 위해 복지 틀을 고치는 나라가 늘고 있다. 국민들의 복지 생각은 다 같다고만 볼 수 없다. 우리 대통령도 전매특허인 국민과의 약속에만 갇혀 있을 것이 아니라 늘 강조해 온 맞춤복지 이념에 따라 살림규모에 맞는 복지의 새 틀을 짰으면 좋겠다. 국가는 정치 권력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의 꿈을 펴는 공간도 아니다. 국민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복지다. 모두에게 행복을 주겠다는 보편적 복지는 유토피아적인 영원한 숙제다. 복지의 단초는 빵을 해결하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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