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하는 전철역 승강장 의자에 누군가 놓고 간 몇 페이지도 안 되는 조그만 책자가 있었다. 잠시 기다리는 짬을 이용하기에 딱 좋은 읽을거리 같아 얼른 집어 들고 펴보니 모 교파가 발행하는 선교용 팸플릿이었다. 누구나 그들의 집요한 접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그 교파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전 같으면 휴지통에 던져버렸을 것인데 나는 늦어지는 전철을 핑계로 첫 장을 넘겼다. 거기엔 ‘왜 당신의 종교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가?’란 제목으로 종교 안에서의 돈 문제, 전쟁 문제, 도덕 문제를 언급하고 ‘신뢰할 수 있는 종교는 과연 있는가?’ 묻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종파의 사람들에게 그 종교를 ‘신뢰하는지 물어보라!’ 당당하고 자신 있게 요구하며 외치고 있었다.

마치 기성 종교인 한국기독교를 향하여 소리 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에 식상한 이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강하게 유혹하고 손짓하며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자격지심인가. 그들이 전개하는 전도 방법이나 주장을 흠잡고 탓할 빈틈이 없었다. 와서 보고 느끼며 깨달아야 한다는 논리를 세미하게 연구했으니 누가 막을 수 있을까. 현혹되면 헤어나지 못하는 이단의 함정을 교묘하게 파 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단성과 파격성을 구체적으로 잘 모른다. 단지 그들에 대한 그러한 나쁜 고정관념에 젖어 있어서 상종해서는 안 되는 기피대상으로 여기며 나의 신앙생활을 여유 있게 지금까지 유지하여 온 것이다. 그런데 몇 장도 안 되는 그들의 조그만 팸플릿 쪽지 안에서 우리 신앙의 아픈 상처와 약점을 건드리며 공격한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긴 한탄을 내 뿜으며 그 책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나는 내 신앙을 내가 얼마나 신뢰하고 있으며 자랑할 수 있는가, ‘교회를 그리고 성도들과 그들을 섬기는 성직자들은 어떤가?’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전철 속의 갈증과 답답함을 애써 풀어보려 하였다.

나는 내가 섬기며 받아야하는 구원이 삶 자체여야 하며 그를 따로 구별하여 종교라는 성역으로 가르는 것에 반대하는 신앙관을 실천하려 하였다.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이해시킬 때 언행이 일치하는 모습을 흠모하며 그런 분들을 존경하여 잘 모시는 신앙습관에 길들여져 왔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부딪히더라도 이해와 관용으로 외면하며 섬기면 어떨까 하면서 우유부단한 신앙관을 정립하여 온 것이다.

내가 그 팸플릿 몇 장에 실린 글에 도전 받고 속이 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철저하도록 성경원리에 충실하지 못하고, 말씀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그리고 솔선수범이 안 되는 늪에 빠지도록 우리는 느슨하였다는 자책감이다. 그것은 나 같은 우유부단한 처신이 좋은 게 좋다는 호의적 처신술로 교회를 망치게 하는 동력을 제공하였다. 거기에는 빛과 소금의 기능은 사라지고 의(義)에 굶주리고 목마른 갈증은 한 방울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단이라 칭하는 교단의 전도지 몇 줄을 보고 나와 나의 교회, 나의 교단, 나의 한국기독교의 부끄러운 허상을 그 거울에서 발견하고 내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비로써 지니게 되었다. 지하철 승강장에서의 고백이다. 17세기 영국 존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회심은 이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전설이요 사건이 아닌가! 무엇을 위하여 당신은 달려가고 있는가. 나라의 정치와 경제, 문화 그리고 북한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을 신뢰라 한다. 믿음을 파는 교회가 신뢰를 받을 만하냐는 질문에 선뜻 나설 수 없다면 누가 그 집단을 존경하고 칭찬하여 이 시대의 등불이며 등대라 하겠는가. 나는 머리 숙여 깊은 사죄를 올리고 싶다. 나의 신앙이력을 보면 그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내 탓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적당히 지혜롭게 살아가야하는 시대에 숙맥(菽麥) 같은 소리를 하면 나는 바보일 수밖에 없다. 은퇴자의 눈은 조금 밝아져도 좋을 것이다. 원심력이 작용하는 구심점에서 벗어나면 더 잘 보이는 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책임질 일도 없으니 편안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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