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8: 35~43)

주일에 예배는 드리지만 교회에 소속된 성도로서의 사명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하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하여 부흥되기를 원하는 사람, 신앙은 있는 것 같은데 쓰임 받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 사랑은 받고 싶지만 사랑하는 것은 귀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지만 주님 앞에 서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은 없고, 희생이나 헌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사람을 건강한 성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때에 그곳에는 맹인이면서 걸인이었던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구걸하던 중에 예수님께서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큰소리로 예수님을 찾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맹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가 구원받았음을 선포까지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자리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던 그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지 무리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구경만하였지,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는 무리 중의 한 사람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무리 중에서 나와 행동하는 자인가?

본문도 비슷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실 때에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단 한사람 삭개오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무리 중에서 나온 자가 주님을 구체적으로 만났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분명 오늘 우리들에게 ‘무리 중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에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것처럼, 오늘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도 안일한 무리 중에서 나와 빛의 용사로, 소금된 성도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리고의 맹인은 무리 중에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서 ‘이 무슨 일이냐?’ 물을 때, ‘예수님이 지나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뛰쳐 나왔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을 보기위해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구레네 시몬도 로마 병사의 명령에 의해 강제적이기는 했지만 무리 중에서 나왔습니다. 무리에서 나온 맹인은 주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무리 중에서 나온 삭개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는 영광을 입었으며,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성도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성도는 군중 속에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무리 속에 있는 자들을 불러서 세상을 변화 시키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역할의 비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맡은 역할이 작아보일지라도 그 역할에 충실 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게 됩니다.

아직도 무리 중에 있다면 이제는 그 속에서 나오십시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직 예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또 육신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사명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편안함보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더 소망해야 합니다.

무리에서 나온 자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마음을 정하고 용기를 내어 무리 중에서 나와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주님을 만나는 그 자리가 최고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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