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H. 카(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고, A. J. 토인비(Toynbee)는 ‘도전과 응전’으로 그것을 설명했다. 전자는 보수와 진보를 긍적적으로 표현한 말이고, 후자는 그것을 대립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역사는 현상을 지키려는 자와 변화시키려는 자의 투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것은 세속사도 그렇고 구속사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수도권의 한 교회에 임직식이 있어서 참석하고 왔다. 그 임직식에 다녀와서 나는 역사를 생각했고 지키려는 자와 변화시키려는 자를 동시에 떠올리게 되었다.

크지 않은 교회였다. 개척된 지 10년이 조금 더 지난 교회였는데 조용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숫자주의에 연연한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 앞의 떳떳한 목회 앞에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교회, 이런 것이 진정한 변화이고 바람직한 발전이 아닐까 싶다.

먼 곳의 농촌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나에게 순서를 부탁해 온 것부터가 변화의 조짐이다. 기존의 답답한 틀을 벗어나고 싶은 변화. 격려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 격려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만 저만한 역설이 아니다. 나는 이런 역설에서 지역과 숫자 규모에 연연하지 않고 말씀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을 읽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3년 공생애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신 마음도 여기에서 멀리 있는 않으리라.

맘몬주의가 온통 사람들의 정신과 혼을 빼앗고 있는 지금,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며 고민하고 기도하는 한 목회자의 마음을 임직식에서 엿볼 수 있었다. 약자를 사랑하라고 외치면서도 강자와 함께 하기를 즐기고 윗자리에만 앉고 싶어 하는 세태이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상을 접수한 것도 부족해 교회까지 접수해버린 듯한 상황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몸짓 같아 더 돋보였을까.

예식의 순서를 맡은 사람에게 뿐 아니라 축하해 주기 위해 온 목회자들에게   작은 정성이라며 교통비가 전달되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임이 분명하다. 경륜과 교회 이름을 앞세운 순서 맡은 목회자를 대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시 된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작은 교회 목회자들도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섬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틀린 것이 아니다.

모두들 의외라는 표정 뒤에 흡족한 마음이 이어졌다. 내게는 변화를 시도하는 한 목회자의 작은 몸짓에 대한 동의로 받아들어졌다. 개혁과 변화를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을 내 놓고, 나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하루가 멀다하고 변화해 가고 있다.

변화의 당위성에 동의하면서도 실천에는 몹시 굼뜬 우리 교계, ‘가하면 예하시오’, ‘폐회하니 ○시이었더라’ 따위의 어투에 연연하는 사고로 세상을 이끌어갈 수 없다. 인습을 전통과 관습이라며 움켜잡고 있는 이상 교계의 미래는 밝지 못하다.

임직예식에서 먼 농촌 교회 목회자에게 순서를 맡기고, 참석한 작은 교회 목회자들에게 일일이 교통비를 전달하는 한 목회자의 손길에서 변화의 조짐을 발견한 것은 나의 예민한 신경 탓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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