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0:17~22)

오케스트라공연 시작 전에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등장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나면 제1바이올리니스트인 악장의 사인에 따라 조율(튜닝)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일정한 순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악장이 오보에 주자에게 표준음인 라(A)음을 불게 하는데 그 까닭은 어느 악기 보다 오보에는 소리가 안정적이고 맑고 투명하여 모든 악기와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청년이 주님께 묻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이는 한 분 하나님이심을 밝히면서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청년이 또 묻습니다. “어느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청년에게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말씀하신 건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하는 그 청년을 보시면서 사랑하사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지적을 하시면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제 이 청년은 그토록 자기기 원하는 영생을 얻음은 물론이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벌어집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조율하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고집하며 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정작 이 청년은 자기가 갖고 있는 물질이 주는 소리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듣기는 듣는데 주님의 음성보다 더 큰 소리가 자신의 소리임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래서 근심하고 슬픈 기색을 띠기도 했지만 정작 그 소리에 조율하기는 싫은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오늘이라는 악보를 갖고 자기의 소리를 내면서 살아갑니다. 때로는 관현악기처럼 경쾌하게, 때로는 현악기처럼 은은하게 소리를 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소리가 어떠하냐가 아니라 제 소리를 바르게 내느냐 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어떠한가요?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 비전, 건강, 취미생활, 일, 자녀문제 등으로 인해 우리가 내야 할 소리를 내지 못해 근심과 슬픔이 우리 곁을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종종 문제가 생기면 ‘무엇 때문에’라고 하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숨는데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 16:24). 무엇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인해 표준음을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조율하기는커녕 여전히 자기 소리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은 슬픔과 근심을 초청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오늘도 우리는 독주가 아니라 사실은 협연인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조율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 하나의 잘못된 소리로 인해 오케스트라 전체의 명성이 실추되듯 나 한 사람 까닭에 가정이, 일터가, 학교가, 교회가, 사회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지 못하고 불협화음, 소음을 내고 있지는 않는지 오늘 본문을 천천히 읽으면서 주님의 말씀에 다시금 조율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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