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1:28~30)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이 매일 선물로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24시간, ‘하루’라는 아주 고귀한 선물입니다. 이 ‘하루’가 모여서 한 주, 한 달, 한 해, 일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희로애락을 갖게 되고, 그러는 중에 친구, 고마운 사람, 은인으로 기억되는가 하면, 때로는 몹쓸 사람, 미운 사람, 원수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시편 104:23).” 이렇게 수고하고 늦게까지 애쓰는 삶의 여정을 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편 127:1~2).”

이런 수고로운 삶의 여정에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애쓰고 수고하여도 다 허사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애씀은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자의 모습임이 분명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가장 귀한 한 글자는 ‘돈’, ‘꿈’, ‘힘’이 아니라 ‘왜’라는 글자라고 합니다. 이 말은 방향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수고와 애씀의 방향이 어디냐를 묻지 않는다면 수고와 애씀 그 자체는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축구시합을 보다가 자살골을 넣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골인을 시키고도 그렇게 참담한 표정을 짓는 선수의 모습은 안타까움 그 자체입니다.

잘못된 방향성의 결과 앞에 선 우리들의 모습을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도서 2:20~24).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생이라는 길을 가는 우리의 삶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의 모습임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쉼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삶의 여정 속에서 우리의 수고와 애씀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물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고 결연한 의지의 표현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삶의 방향이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을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다시금 방향을 수정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우리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느냐는 물음 앞에 겸손히 서라는 것입니다. 쉼을 포기하듯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아시는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쉼을 누리라고 초청하십니다. 구체적인 방법도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는 자신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다음은 주님께로 삶의 방향성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온유와 겸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결과물이 진정한 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쉼이 있습니까? 앞장 서 이끄시는 주님과 함께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쉼이 없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주님이 지금 어디 계시지? 혹 주님이 뒤에 계신 것은 아닙니까? 나는 온유한가?, 나는 겸손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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