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안 된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야당은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조직법을 개정하기도 전에 정부부처를 변경하고 그 기능을 이리 저리 옮기고 장관까지 다 임명해 놓고서는 법 개정을 해 달라고 압박한다면서 국회를 무시하는 행태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 하고 있다. 언론도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문제 삼으면서 국민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줄 수 없다면서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정보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기만이 갖고 있는 정보의 중요성만 유독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정보는 소통하는 가운데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사람은 모여 사는 공동체적 존재다. 가족 간에 서로 대화가 없으면 그것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함께 동거하는 자연인에 불과하다.

한 집에 사는 부부와 부모 자식 간의 불소통은 가정 불행의 단초를 만든다.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사건들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웃 간의 불화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최근 아파트 층간 소음문제로 야기된 살인사건은 불소통이 빚은 전형적인 사례다.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지나칠 만큼 자기 위주의 삶에 푹 빠져있다. 남보다 늘 앞서야 하고 누구의 간섭도 받기를 꺼리면서 이기주의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이러한 성격형성은 어릴 때부터 학습된 결과물이다.

요즘 어디를 가나 유치원 아이들 정도만 되면 디지털 게임기기를 다 들고 다닌다. 가족과 함께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면서도 게임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성인들도 다를 바 없다. 지하철을 타 보라. 모두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바쁘게 손놀림을 하고 있다. 옆에 누가 앉았는지 노인이나 장애인이 앞에 서 있는 것도 아예 염두에 없다. 사이버시대에 빠른 정보전달 기기가 보편화 되면서 사람사이의 접촉과 따뜻한 언어의 교감은 고사하고 인간은 기계의 종속물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과 말을 하는 것보다 기계와의 대화가 더 가치가 있다고들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평생을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교수강의 평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중간고사와 학기말 고사를 전후하여 수강생들로 하여금 교수의 강의 전반에 걸쳐 평가를 하게하는 것이다. 지난해 학기말 나는 흔히 말하는 멘붕 상태에 빠진 일이 있다. 강단에 선 후 처음으로 교수강의 평가에서 하위권에 들었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늘 해오던 대로 꼼꼼하게 강의 준비를 하고 학생들이 구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복사해 주면서 나름대로 성의 있게 강의를 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강의실에 들어가면 스마트폰을 끄라, 옆 사람과 이야기 하지 마라, 엎드려서 잠자지 마라, 가능하면 앞자리에 앉아라는 등 이런 말을 하는 교수를 학생들이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스무 살 안팎의 손자뻘 학생들 앞에서 노파심으로 해 온 강의철학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세대 간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았다. 강의에만 신경을 썼을 뿐 학생들과의 교감이 부족했던 것이다. 소통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남의 일로만 생각했던 나의 우매함을 뒤 늦게나마 인식할 수 있어서 다행으로 여겼다.
자동차 운전석에서는 밖이 잘 보이지만 밖에서는 자동차 안을 잘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입장만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소통을 위해서는 대화법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사회에는 토론문화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민주 토론의 장인 국회를 보라. 국회의원들의 오가는 질문은 검사가 죄인을 다루듯 살벌한 분위기를 연상하게 한다. 청문회 때 마다 볼 수 있는 정경이다. 소통이란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권력자가 상대방을 윽박지르는 데서 쾌감과 우쭐함을 느끼는 모양새다. 소통한다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역지사지는 소통의 문을 여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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