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5:40~41)

사람들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말합니다. 이 명언은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미트가 한 말인데, ‘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끝이 아니라 ‘작은 것이 아름답고, 지속가능한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큰 것보다 오히려 작은 것이 더 유익하고 아름답고 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출세지향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예수님 좌우편에 앉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굉장한 역설입니다. 누가 어린아이 같이 되고 싶겠습니까? 큰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뒤집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 하지만 우린 어린아이의 순수함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주님이 원하신 것은 큰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입니다.

막 15:40~41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남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이름 ‘작은 야고보’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야고보가 나옵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이기도 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3대 제자의 하나인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자 중에 제일 먼저 순교했습니다(행12:1). 또 다른 야고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 형제 야고보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아홉 번째 제자인 작은 야고보입니다(마10:3, 막3:18, 눅6;15, 행1:13). 야고보의 뜻은 ‘발꿈치를 잡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녀서 붙은 별명이 아닐까요?

역사가인 유세비우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제일 예수님을 닮았던 제자가 작은 야고보였다” 무엇을 가지고 유세비우스가 이런 평가를 내렸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추정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작은 야고보는 모범생 제자였다. 성경에 작은 야고보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 이를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는 세 번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명예와 권력을 탐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작은 야고보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딱히 잘못한 일이 없고, 탁월하게 잘한 일도 없었지만 특별히 기록할 만한 허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행동에 티가 나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지도 않았습니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항상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큰소리 치고 떠들고 나대지는 않았지만,조용히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 사람이 야고보라는 것입니다.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킨 사람입니다.

실제 역사의 주인은 이름도 빛도 없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작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작은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보통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어린 아이가 내 놓은 작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 오히려 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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