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에서 진행한 어린이집 발표회 사역이 끝이 났습니다. 10개의 어린이집이 발표회를 했고, 저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마지막 어린이집 발표회를 보며 요즘 제가 묵상하는 ‘은혜’의 또 다른 모습이 체험되었습니다. 수많은 연습을 했겠지만 어린들이 무대 위로 올라가면 실수를 합니다. 연습한대로 안하는 아이, 멍하니 서있는 아이, 엄마 찾고 우는 아이… 가지가지 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런 실수의 모습이 보여도 그들을 가르친 선생님이나 그 아이들의 부모님이나 화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까짓 것도 제대로 못하냐…”라고 화내고 나간 사람 한 번도 보질 못했습니다. 오히려 잘한다고, 잘하라고, 박수 쳐주고, 환호해주고, 응원해주고, 격려해줍니다. 끝나고 나서는 “내 자녀가 제일 잘했다”고 끌어안고 난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로만 보자면 제대로 안 한 그 아이 때문에 전체율동이나 정성스럽게 준비한 코너가 엉망이 되어 피해를 본 셈입니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문제제기 하지 않습니다. 그런 엉터리 격려를 하는 부모를 자식 교육 잘 못한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습니다. 가만 보면 이것은 불공평한 것입니다. 한명 때문에 전체가 피해를 보는데 그 아이가 칭찬받고 격려 받는 것이니 말이죠.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은혜’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내가, 잘한 것이 뭐가 있나요? 잘하기는 커녕, 욕심 부리다가 실수한 것이 어디 한 두 번입니까? 게다가 그 실수의 기억, 그 상처들 때문에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잘한다고, 앞으로 잘하면 된다고, 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변치 않으십니다.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본다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며, 죽도록 고생하며 사는 사랑받을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불공평합니다. 그런데 은혜의 속성이 그런 듯합니다. 아니 아버지의 속성이 그러하니, 내가 그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실수투성이의 아들, 딸들의 재롱잔치를 보며 그저 ‘마냥 행복한 듯~’ 웃는 바보 아빠, 바보 엄마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봅니다. 나의 실수, 의도적 실수를 보면서도 그저 나만 보면 웃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바보 같은 사랑, 은혜…. 감당히 잘 안됩니다. 오늘도 그 은혜를 그저 받기만 해야 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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