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살리는 운동

“술은 사실 없는 대포와 같은데 오히려 용기를 준다고 믿게 하였다. 여러 해 동안 연구한 결과 지금은 그 비밀을 알았다. 그러니 우리는 금주하고 금주운동을 철저히 하여 조선을 살리자. 조선의 금주운동은 모든 운동 중에 가장 큰 운동이다. 육을 살리고 영을 살리는 운동이며 죽어 가는 조선을 살리는 운동이다. 여러분은 때때로 왜 이 금주운동을 잊어버리는가?”

이는 한국교회 절제운동의 한 획을 그었던 손메례가 <기독신보>(1930. 4. 30)에 기고한 글이다. 그녀에게 절제운동은 구국운동, 곧 “조선을 살리는 운동”이었다. 절제운동이 신앙운동의 차원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맥락에서도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한국인 특히 젊은이들의 도덕적 해체작업에 착수했다. 미래의 희망이자 등불이라 할 수 있는 젊은이들에게 퇴폐문화를 주입함으로써 그들을 정신과 육체를 황폐화시키려는 야만적 조치였다. 이를 위해 일제는 1916년 공창제도를 도입하고, 50만 불을 들여 홍등가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총독부의 관할 하에 대규모의 아편 재배와 판매가 이루어졌다. 이는 일본에서는 철저히 금지하던 것이었다. 1918년에는 총독부가 18만2천불의 예산을 들여 아편 재배를 획책했다. 주초의 세입은 전체 총독부의 세입에서 30%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런 일제의 만행은 기독교 정신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 민족과 사회에 대한 고도의 파괴공작일 뿐 아니라 그동안 한국교회가 추진해 왔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이에 한국교회는 절제운동을 비롯해 각종 민족 계몽 및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기독교 선각자들은 이 같은 퇴폐문화가 가져올 가정적·민족적 파멸을 우려하여 금주, 금연, 공창폐지와 같은 정신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일제에 대한 항일운동의 정서도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특히 절제운동은 신앙운동을 표방했지만 민족의 정신적·경제적 자율과 자립의 정신을 곧추 세우려는 항일운동의 성격도 강하게 내포되고 있었다.

이런 절제운동의 중심에는 1924년 8월에 정식으로 발족한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세계여자절제회 소속 선교사로 중국에서 사역하던 틴링(C. I. Tinling)의 영향이 컸다. 틴링은 세계 각국을 다니며 각 지역마다 절제회를 조직하여 절제운동을 확산시켰던 인물이다. 손메례의 활약은 지대했으며, 내한선교사들은 물론 국내 유수의 여성지도자들이 절제운동에 적극 호응했다. 그 결과, 여자절제회는 1924년에는 16지회에 1500여명, 1928에는 전국 52개 지회에 회원 3000명 이상으로 성장하였다.

절제운동이 거둔 성과도 상당했다. 1931년에 발행된 <신정찬송가>에는 ‘금주가’가 실릴 정도로 한국교회는 절제운동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다. 금주가의 후렴구는 "아 마시지마라 그 술/ 아 보지도마라 그 술/ 조선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는 가사가 반복된다. 한국교회는 이런 금주운동과 같은 일련의 절제운동을 통해 사그라들던 조선의 불씨를 다시 지펴보고자 하는 강한 염원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 염원은 1932년 12월부터 전개된 ‘미성년자 음주 금연법’ 제정운동을 이어졌으며, 1938년 4월에는 ‘청소년보호법’ 제정을 이끌어내었다. 그것은 비록 작지만 매우 소중한 결실이었다. 

최근 한국사회에는 퇴폐적 문화가 범람하고 있다. 일명 각종 ‘00방 문화'의 만연은 그런 사회적 실상을 잘 보여준다. 그 배후에는 ‘술 권하는 문화'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 청교도적 혹은 성결운동적 신앙윤리를 구태의연한 것이라고 비난하다가 치열한 문화전쟁의 속내를 들여다보지 못한 결과는 아닌가. 문화적 신앙에 휘둘려 복음적 미덕과 유산을 구식이라고 치부해 버리기 전에 먼저 신앙의 중심이 느슨해져버린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망국(亡國)의 비난을 면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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