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지금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독립협회는 한국의 개화기에 애국운동과 민주화 선봉에 섰던 단체이다. 이상재는 서재필, 윤치호와 함께 독립협회의 창립과 발전을 주도했던 핵심인물이다. 그때만 해도, 그는 서구 문명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서재필이 독립협회 성격을 기독교적으로 규정하려 할 때도 반대했다. 

그런데 이상재의 이런 생각이 전적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수구세력의 모략으로 한성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곳에는 이승만, 남궁억, 유상준, 김정식, 이원긍 같은 옥중동지들이 있었다. 먼저 그들이 이상재에게 기독교를 소개했다. 그 와중에 동양고전과 기독교 서적을 비교 연구했지만, 그는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삶과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03년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위대한 왕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말했다. “몇 년 전 당신이 워싱턴에 갔을 때, 내가 성경을 주어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대가 이를 거절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죄이다. 그리고 독립협회에 있을 때에도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당신이 반항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까지도 방해하였다. 당신이 이렇게 민족의 앞길을 막았으니 이것이 더욱 큰 죄이다. 나는 그대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감옥에 가두었는데, 당신이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이다. 만일 지금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이전보다 더욱 큰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신비한 체험을 계기로, 이상재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 사건은 삶의 대전환점이 되었고, 이후의 삶을 견인하는 궁극적인 에너지원이 되었다. 이 사건을 빼놓고서는,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 개종 후, 그의 애국 및 구국운동도 새로워졌다. 그 중심에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자리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비전이 그의 삶을 이끌어 갔다. 영원의 관점에서 이 세상의 질서를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궁극적 심판은 그의 행보에 중요한 메시지가 되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온갖 불의와 부패에 항거하는 옹골찬 행진을 시작했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애국운동이자 민주화운동이었다. 출옥 후의 일이다.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1905년 11월 9일)된 후, 하루는 고종이 이상재를 불러 의정부 참사관을 제수(除授)하였다. 그러나 이상재는 상소문을 올려 어명(御命)을 거역하고 단호하게 물러설 뜻을 밝혔다. “… 신(臣)은 비록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할지라도 이런 매국의 도적들과는 조정에 같이 설 수 없사온 즉, 폐하께서 만일 신이 그르다고 생각 하시면 신의 목을 베이사 모든 도적들에게 사례하시고 만일 옳다 여기시면 모든 도적의 목을 베이사 온 국민에게 사례를 하소서.” 현실주의를 내세우며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파렴치한 자들과 함께 정사(政事)를 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사회 전반에 정치를 위한 정치가 난무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전반에 걸쳐 소수의 횡포가 극에 달하는 ‘난장판 정치’가 무르익은 것 같다. ‘악인이 흥하면 의인이 숨는다.’라고 했던가. 하나님의 이름을 행하는 교계는 어떠한가. 인권을 떠벌리면서 인권을 억압하고, 민주를 노래하면서 독재의 칼을 휘두르고,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복마전을 만들고, 예수의 주되심을 부인하면서 복음적 신앙이라 포장하고…. 그 많던 옹골찬 의인들의 음성은 어디로 숨어버렸나!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참다운 기독교적 회심이란 무엇일까? 향기가 아니라 악취가 분명한데도, 예수의 이름이나 교회의 이름으로, 고집스럽게 그 악취를 내뿜는 사람들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도 정말 하나님을 만난 것일까? ‘위대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참으로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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