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공식적 개신교 선교는 1884년 알렌 선교사가, 다음은 1885년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사역이라고 본다. 이보다 19년 앞선 1866년 영국의 토마스(한국명 최란헌) 선교사가 대동강으로 평양에 왔으나 상륙하지 못하고 참수형을 당했다.
그런데 토마스보다 34년 앞선 1832년, 화란선교회 소속 칼 귀츨라프 선교사가 충청도 ‘고대도’에서 20일간 머문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역사다. 물론 귀츨라프 이전에 화란인 벨트브레나 하멜이 개신교인으로 이 땅에 발을 들여 놨으나 전교나 기독교적 영향은 전무하다 할 것이다.
1832년 7월 25일, 조선의 문호 개방을 요구하는 동인도회사 선박(The Lord Amherst)이 충청도 홍주(현재 충남 보령) 작은 섬 고대도 해안(안항)에 정박했 다. 이 이양선에 통역인, 의사 및 선목(船 牧)의 자격으로 귀츨라프(Karl Friderich August Gutzlaff)가 탑승했다.
그는 1803년 7월 8일, 프러시아(현재 독일)에서 태어나 10대 때부터 선교사를 열망했으며, 경건주의 요람지로 근대 선교사를 대량 배출한 할레(Halle)의 학교 에서 수학했다. 런던선교회 모리슨의 영향으로 중국에 관심을 두고, 1826년 네델란드선교회 파송으로 동양에 오게 되었으며 사이암에서 선교했다.
중국인을 통해 어학 실력을 닦아 사이 암어 신약성경 번역, 일본어 요한복음 번역, 모리슨과 구약성경을 번역하는 등 경탄할만한 동양어 실력을 쌓고 상당한 의술까지 겸비했다. 탁월한 언어 습득 능력과 솔직하고 자유로워 대인 소통이 원활한 성품과 행동,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는 등 선교사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다.
고대도에 당도한 그는 홍주 목사 이민 희를 통해 조선 왕 ‘순조’에게 한문성경과 26종의 책자, 망원경을 비롯한 선물을 진상하며 정부의 통상 허락을 기다렸다.
회신을 기다리며 주민들에게 서양 문물과 지식을 소개하며, 한문성경, 책자, 직물, 약품 등을 나눠주고, 감자와 포도나무 재배법 및 포도주 담금법도 전하고, 주기도문을 한글로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한문성경의 반환과 함께 통상을 거절하는 조정의 회신으로 20일만인 8월 12일 이양선과 함께 이 땅을 떠났다.
떠나기 앞서 이후 외국 난파선에 대한 조야의 인도적 보호와 원조를 요청하여 허락받음으로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이렇게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는 아쉽게도 단막극으로 끝났다.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차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그는 다시 오지 않았으나, 한글의 자모를 배워 중국잡지를 통해 세상에 알렸 고,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린 그의 논문 한글에 대한 소견 은 영어권과 독일어권에 소개되었다.
그가 다녀간 지 150년 후인 1982년 고대도에는 교회가 설립되고, 이후 예장합 신총회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교회로 지정했다. 10여 년 전부터 칼 귀츨라프학회 주최로 귀츨라프 축제가 열리고, 최근에는 귀출라프 감자심기 기념예배와 감자 심기대회가 원산도 초전교회에서 개최되 었다.
필자는 동료 목사의 안내로 원산도에서 귀츨라프 선교사 선교원년기념비를 보고, 그의 우리나라 방문이 바로 이 지역이란 사실에 감동했다. 카페에서 바다 건너 고대도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젖었다. 기회를 만들어 고대도에 가 기념관도 둘러볼 참이다. 선교사의 발걸음으로 복음은 오늘도 산을 넘고 물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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