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E. 카우만(Charles Elmer Cowman)은 한국성결교회의 모체(母體)가 되는 동양선교회(OMS)의 핵심 설립자이다. 그는 초기 한국성결교회의 영성과 정신 그리고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실제로, 한국성결교회의 초석을 놓은 초기 사람들은 대부분 동경성서학원에서 훈련받은 그의 직계 제자들이었다. 한국 사역이 시작된 후에도 그는 한국을 방문하여 복음전도관과 경성성서학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11년과 1912년에 각각 완공된 무교정복음전도관과 최초의 경성성서학원 건물의 건축은 주 안에서 감당했던 그의 수고와 노력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찰스 카우만은 1868년 3월 13일 데이비드와 메리 카우만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00주년 감리교회(The Centenary Methodist) 속장으로 많은 사람의 기대와 존경을 받았다. 가정 예배와 성경 읽기는 가정의 하루 일과였고, 어머니의 기도 소리도 끊어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경건한 믿음의 가정이었다. 

그리고 그 집은 지역에 오는 순회 전도자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찰스의 부모는 대단히 명예롭게 여겼다. 그런 영향으로 찰스 카우만은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고, 이기적이지 않았으며, 성품도 믿음직했다. 주일이면 교회 가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또래에 비해 해박했다. 대체로 그의 어린시절은 매우 평온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슬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찰스가 13세 때(1881), 한 살도 되지 않은 여동생(Lillian)이 병으로 죽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찰스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고, 한동안 그의 눈에서 슬픔의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했던 동생을 데려가신 것일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일이 선한 것이었나?” 어린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이 일어났다. 

그해 여름은 매우 길고 슬프고 외롭게 더디 지나갔다. 더 이상 새들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도 다가오지 않았고, 꽃들도 아무런 메시지를 주지 못했다. 겨울은 상처를 더 깊게 만들며 황량하고 텅 비고 차가운 날들로 다가왔다. 그런데도 그는 그 마음을 어머니에게조차 열어 보이질 못했다.

그 와중에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하루는 저녁집회 말미에 회중이 “너희 가난하고 빈곤하고 약하며 상처 입은, 병들고 슬픈 죄인들은 오라”는 찬양을 불렀다. 누가 설득하지 않았지만 찰스는 회개자석(mouner’s bench)으로 나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여동생의 죽음으로 생겨난 반항심과 두려움을 주 앞에 내려놓았다. 그때 어린 마음에 한 줄기 빛이 슬며시 들어왔고, 팔에 어린 양을 안고 푸른 초장을 걸어가는 선한 목자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모든 두려움을 잠잠케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네 동생에게 유익한 것이란다. 우리는 새로운 기쁨을 더해 주고 있는 많은 집에서 그 아이를 필요로 했단다. 언젠가 너도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란다.” 

주께서 위로의 말씀을 하실 때, 찰스의 마음에는 신비한 평안과 단념하는 마음, 밝은 빛과 계시가 있었다. 그 순간의 감동은 찰스가 죽을 때까지 그 영혼에 낙인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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