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헌의 개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것은 평양 대부흥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헌은 전국적인 ‘큰 부흥’이 일어나고, ‘진리적 교회와 신자’가 배출되는 시기에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때 자신에게 일어났던 신비한 현상과 변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나라에도 20여 년 전에 큰 부흥이 전국적으로 전해지는 동시에 진리적 교회와 신자가 전국에서 산출되었다. 그 때에 나는 처음 신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연히 기도할 마음이 나서 주야로 기도하며 다른 책은 도무지 보기 싫고 깊은 의미는 알지 못하나 신구약성경은 전심으로 읽었다. 예배에 출석하여 설교를 듣는데 지위와 학식이 많더라도 세상적으로 하는 것은 마음에 환영이 되지 아니하나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성경 말씀과 천국과 영생을 말하면 나에게 꽃송이가 되어 심령에 큰 만족과 위로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곧 성신이 부흥으로 나에게 직접 임하사 하신 일이다.” 이명헌 자신도 몰랐지만, 성령께서 부어주신 부흥의 불길에 그의 첫사랑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다. 주야로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깊은 의미는 알지 못했지만 성경의 말씀이 꿀처럼 달콤했다. ‘성경 말씀과 천국과 영생’에 대한 말은 그에게 꽃송이가 되었고, 심령에 큰 만족과 위로가 되었다. 

이런 첫사랑의 열정은 자연스럽게 신앙적 헌신으로 이어졌고, 이명헌은 게일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늦어도 1908년 2월에는 연동장로교회의 조사(助事)로 임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8년 2월에는 왕십리교회에 박승명과 함께 조사로 파송되어 시무하였고, 이후 뚝섬교회에도 파송을 받아 성실하게 시무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헌은 자신이 연동교회의 조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내가 처음에 출석하던 회당은 천명 이상의 신도가 회집하는 교회인데 나의 열심으로 성경을 읽고 배우는 일과 부지런히 기도하는 것과 전도하는 것과 교회와 사람 앞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전 회중이 말하기를 아무개는 신앙과 행동이 가감(可堪)하니 교회에 사역자로 세우자는 동의(動議)로 피선(被選)된 일도 있었으나 …”

조사(Helper)는 교회의 사역자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1907년 9월까지만 해도 장로교에는 한국인 목회자가 없었다. 연동교회의 장로로는 갓바치 천민 출신의 고찬익 장로가 유일했다. 그런데 기독교에 입교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명헌이 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적 열심과 헌신이 회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즉 이명헌의 조사 직분은 전 회중의 추천과 동의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명헌은 연동교회의 조사로 성심을 다해 활동했다. 그는 교회와 사역자 그리고 성도들의 인정을 받는 일꾼이었다. 

그 와중에, 이명헌은 구리개전도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체험했다. 1908년 겨울 구리개전도관에서 일어났던 큰 부흥의 역사는 한국 성결운동의 오순절과도 같았다. 그 성결부흥의 역사로 온 서울의 교회가 다 움직이게 되었으며, 한국교회와 사회에 성결교회의 색채를 강하게 어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부흥집회에는 일반 신자들뿐 아니라 교역자들과 선교사들도 참석하였고,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 각각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거듭나는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되는 성결을 체험하게 되었다. 은혜를 받은 신자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손바닥을 치며 찬미를 부르고, 마치 굴레 벗은 송아지와 같이 뛰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선교사는 이들을 ‘뛴 패’라고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이것은 동양선교회가 한국에서 추수한 첫 번째 오순절의 은혜였다. 이 부흥의 때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특히 연동교회 조사였던 이명헌, 집사 원세성, 박용희, 배선표, 박제원, 여조사 원경신 등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연동교회로 돌아간 박용희를 제외하고 동양선교회에 교적을 옮겼고, 이후 한국 성결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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