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회는 사중복음의 교회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결의 가르침과 체험은 성결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할 분명한 이유와 사명이다. 이것이 성결교회 선진(先進)들의 확신이다. 최근에 많이 퇴색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깝지만, 다시 복원하고 갈고 닦아야 할 놓칠 수 없는 유산이기도 하다. 장로교 하면 예정, 루터교 하면 칭의, 감리교 하면 성화, 오순절 하면 방언을 떠올리듯이 성결교 하면 성결을 먼저 생각했다. 성결을 떠나서는 성결교회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결은 성결교회의 상징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일화로 엮는 성결교회 이야기>는 성결교회 선진들의 회심과 성결 체험을 중심으로 꾸며보고자 한다. 

“중생에 대한 성신의 역사는 다만 그 영의 생명이 새로 남을 얻는 일에 불과하나, 이 성신세례는 완전하여지는 역사요 또한 여러 가지 승리의 능력을 얻는 은혜이다. 이 성신의 세례가 임하는 때에 마음속의 원죄 곧 죄악의 근성이 없어지고 그 대신 성신이 충만히 내주하여지며 또 비상한 능력으로 죄악과 세상과 악마의 역사를 이기고 진리로 모든 영혼을 구원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명헌 목사가 설파했던 중생과 성결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명헌 목사(1876~1928)는 경성 성서학원(서울신대 전신)의 첫 번째 졸업생이며, 1914년에 열린 성결교회 제1회 목사안수식에서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6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이명직 목사를 회심으로 이끌었던 인물이며, 성결한 목자의 삶을 살았던 성결교회의 진정한 사표(師表)라고 할 수 있다. 1907년, 이명헌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였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투를 깎고 연동장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상투는 성인과 그에 따른 존경과 책임의 상징이었다. 자존심과 위엄의 깃발과 같은 것이었다. 

상투가 없이는 성인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존칭도 붙여지지 않으며, 정중한 대우도 받지를 못했다. 상투는 ‘조선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고 또 가장 보편적으로 확고하게 정착된 전통과 미신적 관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투를 잘라버린 것이다. 초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을 파괴한 후 상투를 자르는 것이 오랜 구습과 악습 그리고 미신적 행위를 아주 효율적으로 타파하는 적절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또한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열렬한 신자의 표징처럼 여겨졌다. 1907년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폭발된 부흥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던 대부흥운동의 시기였으며, 일본 동경성서학원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성결교회의 최초의 전도자인 김상준(1881~1933)과 정빈(1876~1949?)이 서울 염곡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명헌은 무교정전도관의 한 집회에서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이유에 대해 간증하였다. 존 토마스 부인이 남겨놓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선교사가 쓴 지리책을 읽은 결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 책을 연구하는 동안 많은 나라들이 번영한 것은 기독교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놀라운 비밀을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는 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들의 삶이 놀랍게 변화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곧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여 개종했다. 그는 마귀의 많은 시험을 받았지만 승리했고, 더 많은 은총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이명헌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기독교가 문명의 개화와 번영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리공부를 통해 세계관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성경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의 변화를 이끄는 성경의 비밀이 그의 영적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곧, 그의 개종에는 세속적인 욕구와 신앙적인 욕구가 함께 작용한 것이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