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교인들은 순교일을 더 중시 …  이교도 문화 유입되며 축제성격으로
영국 청교도 시절 부정되던 성탄, 빅토리아여왕 때부터 가족중심 명절로  
현대적 이미지는 성 니콜라우스가 소설에 등장하며 산타-루돌프로 진화 

현재의 화려한 성탄절 모습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전해준 첫 번째 성탄절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에게 친숙한 성탄절 이미지는 영국의 청교도와 빅토리아 여왕, 찰스 디킨스의 소설, 20세기 초반에 주로 활동한 시인과 화가, 기업 광고에 대부분 영향을 받았다. 덕분에 최근 일각에서는 상업적인 어린이 중심 명절을 탈피한 성탄절의 기독교적 재개념화가 필요하다는 요구를 제기하기도 한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의 탄생일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기념하려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악이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났다는 게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기서 더 나가서 육신의 생일을 기념하는 사람들의 관습을 냉소하고 비판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오리게누스는 시민들이 해마다 로마의 탄생 기념일을 축하하는 것을 조롱하면서 이교도 관습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교회에서 예수님이나 순교자의 생일을 확인하고 기념하려는 시도 역시 강력한 반발을 샀다. 그리스도인이 기념해야 할 날은 신앙과 목숨을 맞바꾸어 새롭게 태어난 진정한 생일, 순교일이었다. 

탄생일 축하에 대한 교회의 부정적 태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날을 중시한 전통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는 히브리 달력으로 니산월 14일에 돌아오는 유대인의 대표적인 명절 유월절에 진행된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사건을 아주 소상하게 소개했다. 그 때문에 2세기 중반까지 유대인들의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그리스도인들 역시 교회의 주요 절기로 함께 지켰고, 성탄절보다 훨씬 앞서 기독교 절기로 발전한 부활절 역시 유월절에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전 5:7~8). 이처럼 1세기와 2세기 초반까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성탄보다는 사역과 수난, 부활에 대부분 관심을 집중했다.

교회가 예수님의 탄생 시점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200년 무렵에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주님이 태어난 시기를 아예 5월 20일이나 4월 20일, 또는 21일이라고 확실하게 못 박는 사람들이 있다는 글을 남겼다. 221년에는 섹스투스 율리우스가 크로노그라피아이(Chronographiai)에서 역사상 최초로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확정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역시 기독교를 공인하고 23년이 지난 336년에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로 공표했다. 물론 이것은 콘스탄티누스가 단독으로 결정하지 않고 논란의 여지가 가장 적고 이미 널리 입증된 날짜를 주변과 상의해서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스도의 여러 탄생일 가운데 굳이 12월 25일을 기념일로 삼은 데는 두 가지 유력한 가설이 존재한다. 성탄절의 기원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교도 축제에서 빌려왔다는 주장이다. 로마에서는 12월 하순에 일주일간 농신제를 지냈는데, 274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원정 후 12월 25일에 무적의 태양이라는 뜻의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신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로 대체했다. 이후로 황제들은 줄곧 태양신을 수호신으로 삼고 기념일을 축하했고 콘스탄티누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교 기원설은 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기 시작한 게 더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경쟁 관계였던 태양신 신앙을 대체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간주한다. 이 가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의 신앙과 풍습과 차별화를 추구하던 시기에 굳이 이교 축제를 차용할 생각을 했는지에 관해서 해명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갖는다. 실제로 12월 25일로 성탄절 날짜가 정해진 3세기 기독교 문헌에서는 이교의 축제를 수용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는 이교도들이 사용하는 제사 공간이나 축제를 의도적으로 기독교화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중반 이후부터였다.

또 다른 가설은 성탄절 날짜의 기원이 이교보다는 오히려 유대교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따르면 랍비들은 니산월에 세계가 창조되었고, 구약성경의 족장들 역시 같은 달에 태어났고 장차 구속받을 것으로 믿었다. 창조와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신앙이 기독교 연대기에 영향을 미쳐 예수님이 죽음을 맞이한 날과 탄생한 날을 규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십자가 처형이 니산월 14일, 로마력으로 3월 25일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초기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십자가 사건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방문해서 수태를 고지한 날과 같았다. 그렇게 해서 3월 25일을 기준으로 임신 기간 9개월을 계산해서 나온 예수님의 탄생일이 12월 25일이었다. 4, 5세기 아프리카 히포에서 주교를 지낸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의견이 같았다. 그는 20년간 집필한 삼위일체론에서 “전통에 따르면 주님은 3월 25일에 잉태되어 12월 25일에 태어났고, 잉태한 날과 동일한 날에 고난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소수의 동방 교회들이 1월 6일을 성탄일로 지키기도 하지만, 이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한 달력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성탄절 날짜를 확정한 교회는 4세기 중반부터 선교를 통해 접촉한 이민족들과의 활발한 교류 과정에서 이교 풍습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부활절을 앞둔 사순절처럼 금식과 참회를 강조하는 대림절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성탄절부터 이듬해 1월 6일의 주현절까지 12일간을 대부분 휴일로 보냈다. 여유 있는 영주들은 소작농들에게 그 기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 허락했다. 이 무렵 이국적 식탁 메뉴, 그리고 가면극이나 바보제 같은 이교도들의 명절 풍습이 교회에 유입되었다. 영생을 기원하는 상록수나 화환으로 집 안팎을 장식하는 풍습이 성탄의 계절을 보내는 중세 기독교 가정에 역시 정착했다. 나무 숭배는 중북부 유럽인들 사이에서 흔한 신앙이었는데, 특히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는 이 무렵 악한 세력을 쫓기 위해 집과 헛간을 상록수로 장식하고 새들을 위해 나무를 세우는 풍습이 기독교 개종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이런 풍습은 18세기에 독일 루터교인들 덕분에 세계 여러 곳에 보급되어 화려한 트리 장식으로 지금껏 살아남았다.

종교개혁은 미신과 판타지가 뒤섞인 성탄절 풍습을 현실화하도록 공헌했다. 루터는 성탄절을 부정한 츠빙글리나 애매한 입장의 칼뱅과 달리 성탄 축하를 반대하지 않았다. 직접 성탄 음악을 작곡하거나 성탄 기념 소품을 마련하고, 성탄을 주제로 설교했다. 반면에 성탄절에 성인을 숭배하거나 동방박사의 유물을 진품으로 인정하는 것에는 인색했다. 나중에 성탄절과 관련된 인물로 발전한 성 니콜라우스의 기념 축일(12월 6일)을 성탄절로 옮기고 아기 예수로 역할을 대체하게 했다. 성탄절은 17세기 중엽 이후 영미권을 중심으로 심한 부침과 변화를 겪었다. 

1644년 올리버 크롬웰의 영국 의회는 부적절한 성탄절 문화와 로마 가톨릭의 분위기를 문제 삼아 성탄절을 더럽혀진 인간들이 발광하는 날이라고 규정한 청교도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해서 성탄절을 법으로 금하고 위반자를 체포하는 강력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다수의 영국인이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바람에 매년 성탄절 무렵에는 폭동이 다수 발생했다. 청교도의 완고한 주장은 아메리카 식민지까지 영향을 미쳐 1659년 매사추세츠주 역시 성탄절을 기념할 경우 벌금을 부과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 뒤로 뉴잉글랜드 전역으로 성탄절 금지법이 확대하자 영국과 마찬가지로 거센 반발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성탄절의 부정적 이미지는 184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반전했다. 성탄절에 우호적인 독일 개신교 왕가의 영향을 받은 영국 여왕은 국민에게 성탄절이 가족 중심의 축제가 될 수 있다는 모범을 직접 보여주었다. 이전까지 교회의 전례 행사와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축제이면서 공적 의식과 시민 활동 위주였던 성탄절이 이때를 기점으로 상업적 성격의 어린이 중심 명절로 변모했지만, 교회의 역할은 반대로 위축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 6년 뒤 찰스 디킨스가 발표한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은 전통적인 성탄절을 탈피하게 만든 또 다른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성탄절이 제목에 포함되었으나 아기 예수 탄생의 구속사적 의미보다는 개인적, 사회적 화해와 즐겁고 좋은 시간을 강조하는 인도주의가 단연 두드러진 작품이었다. 영국 사회에서 성탄절에 일하는 문화가 사라진 것도 디킨스의 소설 덕분이었다.

성탄절의 현대적 이미지는 고대 소아시아에서 빈민을 도운 것으로 유명했던 성 니콜라우스가 19세기 소설과 시에 등장하면서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나무 위를 날아다니고 굴뚝을 타고 내려와 양말에 선물을 넣고, 나중에는 순록과 함께 썰매를 타고 누비는 모습으로 그려진 성 니콜라우스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뉴욕 시민에게 선행을 격려하려는 한 자선사업가와 소설가의 시차를 둔 협업의 결과였다. 역사적으로 성탄절과 전혀 무관했던 마법적 캐릭터 산타클로스는 높은 인기 덕분에 전쟁을 지원하려고 군에 입대할 뿐 아니라 상품을 판매하는 상업적인 모델로 진화를 거듭했다. 나중에는 빨간 코 사슴 루돌프가 산타와 나란히 파트너로 등장했고, 1930년대부터 거의 30년 이상 코카콜라를 마시는 산타클로스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얼굴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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