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구석에 홀로 불을 밝히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섰는 소박한 예배당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한파가 찾아왔다. 영하의 날씨, 추운 아침 출근길, 거리 속 사람들은 더욱 움츠러들고, 시선을 어디론가 고정하며 어디론가 바삐 걸어간다. 어서 추위를 피해, 따스한 온기가 스며있는 버스 안, 전철 안, 집 안, 오피스 안으로 피신하기 위해 서둘러 걸어간다. 다들 이렇게 바삐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간 거리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다. 너무도 냉랭하다. 어찌할 방도가 없다. 분명, 거리의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며, 묵을 곳을 찾고 있는, 산달이 찬 마리아, 그리고 그 곁에 선 요셉 같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미의 태 안에서 세상 바깥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예수님과 같은 아기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거리는 너무도 차갑다. 다들 각자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하다 보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잘 사는 삶에 대한 가치 기준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또한 이를 충족할 소득 대비 지출은 날이 갈수록 상승하기만 한다. 그러니, 소박하고 평범한 가족을 이룬다는 것 역시 어떤 신화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는 그런 이야기가 저기 저 거리의 변두리 구석에서도 펼쳐지기 어렵게 되었다.


분주했던 도시 베들레헴은 저기 저 구석에서 안식하며 해산할 외양간이라도 있었고, 태어난 아이를 누일 구유라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도시는 그렇지 않다.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으로 임하신 그 변두리의 자리를, 사람들은 철저히 외면한다. 높은 첨탑과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오로지 자본의 가치와 영광만을 추구하고, 그렇게 자본에 잠식된다.


변두리에 임한 진리를,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비극이다. 예전의 우리는 말씀으로, 진리로 오신 주님을, 온 맘 다해 경배했던 과부, 노인, 목동들, 이방인들 같은, 저기 저 변두리의 소외된 자들과 같이 순전한 자들이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저기 저 변두리에 이미 임마누엘로 임하신 주님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굳은 마음을 가진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되어버렸다. 


우리도 한 때 복음으로부터 이방인이었고, 변두리였다. 그랬기에,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단기간 동안 빠른 부흥과 성장, 선교적 확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특히, 탈교회화 현상과 인구위기가 가속화 되며, 각 교회 내 역피라미드 형태의 구조가 고착화되고, 여러 형태의 정체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다시 회복해야 한다. 다시 보아야 한다. 다시 들어야 한다.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기 저 보이지 않는 곳 변두리에 임하신 사실과 이유를 다시 보고 들으며,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 변두리의 자리에서, 왜 우리 주님께서 마리아와 요셉 부부에게서 한 아들로 나셨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변두리의 자리에 나신 예수를, 변두리의 인생들이 어떻게 가장 먼저 알아보고 맞이했는지도 말이다. 변두리의 영성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날씨의 한파, 경제의 한파, 인구의 한파, 여러 지표들의 한파로 수많은 이들이 추운 겨울을 보낼터이다. 그럴 때일 수록, 사람들은 바벨탑과 같은 저 높은 첨탑과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연말을 보내며 위로를 얻으려 한다. 하지만, 그 곳에는 위로보다 공허 뿐이다. 


오히려, 기억할 것은, 저기 저 변두리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복음에는 한파가 없다는 것이다. 그 진리의 온기, 복음의 따스한 온기를 기억하며, 저기 저 도시 한 구석에 홀로 불을 밝히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섰는 소박한 예배당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그 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만나는, 귀한 연말이 되길 소망한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