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광정교회 34년 목회활동

임종렬은 신학대학 졸업반인 1968년 7월, 여름방학 때 광정성결교회에 부임했다.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는 시골이지만 예부터 호남인들이 서울로 걸어 올라가다 높은 차령산맥을 앞두고 이 마을에서 밤을 쉬는 곳이어서 객주와 작부들이 많아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1947년에 서울에서 고향으로 온 성도 몇 사람이 모여 집 하나를 사서 교회당으로 수리하여 교회를 세웠다. 그동안 여러 교역자들이 열심히 전도하여 40~50명 모인 교회였으나, 교인들끼리 계속되는 분란으로 교역자들이 계속 사임하는 교회로 소문나서 교회가 폐쇄 직전이었다. 전임자도 성미 지급이 문제가 되었다. 목사 지지파는 성미를 말(斗)로 드려야 하고, 반대파는 성미를 되로 드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반대파가 장악한 성미부에서 오래된 냄새가 나는 성미를 주자, 목사가 이 사실을 지지파에게 알려 더 큰 다툼이 일어 사임하고 갔다.

그는 부임 한 달쯤 되어 첫 목회지에 크게 실망했다. 그때 그를 방문한 이관직 원로집사가 그에게 말했다, “참된 장수는 패잔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다” 훈장 출신 그분의 말씀에 정신이 퍼뜩 났다. 그는 자기를 보내신 주님의 뜻도 여기에 있음을 깨닫고 회개했다.

교회에 붙은 작은 방과 부엌이 교역자의 방이었다. 그는 부임할 때 아내와 어린 셋째와 넷째만 데리고 왔는데, 방이 작아서 큰 아이들 둘은 할머니가 해남에서 당분간 키우시게 했다.

첫째 달부터 성미를 주는데 식구가 넷이라며 세말(3斗)을 퍼주고 갔다. 그런데 쌀에서 냄새가 나서 보니, 썩은 쌀 성미였다. 그동안 교역자가 오랫동안 비워 쌀 관리를 잘 하지 못해 그냥 드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불평 없이 그 밥을 가족들과 감사하며 먹었다.

어느 날 원로집사가 왔다가 냄새가 나는 밥을 먹는 것을 보고 주일 직원회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며 성미부장을 야단쳤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 달 동안 성미 밥을 먹어보니 냄새는 났으나 먹음직했습니다. 교역자는 성도들이 주는 대로 감사하며 먹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에 직원들이 놀라며, 참 교역자라고 존경을 했다.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자 교회는 교역자의 말에 순종하며 안정적으로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목회 4대 목표를 세웠으니 그것은 주일성수, 금주운동, 주민들의 감정순화, 순수한 가정의 조성 등이었다. 이를 위해 철야기도하면서 심방과 전도에 많이 힘썼다. 

그는 남은 한 학기를 토요일에 내려와서 일하고 월요일에 상경하여 공부했다. 1969년 2월에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정식 전도사가 되었다. 3년 후 목사고시 5과목을 패스하여 1972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목회사역은 더 확대되고 성장하였다. 그는 어려서 배운 유교의 윤리적 바탕에다 누구에게나 예의와 덕을 베풀어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다. 그리고 복음의 확신으로 가는 곳마다 전도하므로 교회는 갈수록 부흥되어 교회에서 주일 예배 때마다 가득찬 성도들이 부르는 힘찬 찬송으로 마을에는 활기가 넘쳤다. 

그가 평생을 섬긴 광정교회에서 기록될만한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유치원 설립: 유아들의 신앙교육으로 교회의 기둥으로 자라게 했다(1971-1975). 2) 한일고교 채플인도: 신앙학생 위해 오후예배 인도-후에 교회 9시예배로 정착되다. 3) 공주교도소 선교회 봉사: 20년 간 헌신봉사로 법무부장관 표창을 받다. 4) 장로 4명 임직식 거행: 5년마다 장로후보 1명씩 선발, 교육하여 임직하다. 5) 교회당 신축 2회: 1차 80평(벽돌 1층), 2차 200평(벽돌 2층-현 교회당) 6) 장학회 조직: 장학금(교회 예산과 임 목사의 특별헌금)으로 해마다 3명씩 선발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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