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도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저로서는 인간다운 삶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살을 시도하기 다섯 번만에(네 번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자살에 성공한(?)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그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인간 실격’을 “너무도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시작한다. 일본문화의 기반을 부끄러움(수치)으로 이해한 루스 베네딕트의 증언(국화와 칼)을 익히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문화의 기저를 이룬다는 부끄러움에 이미 함몰되었던 것은 아닐까.

▨… 그의 다른 자전적 소설 ‘사양’은 그의 자살을 예고해 준다. 나오지의 유서가 그것을 보여 준다. “저는 저라고 하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햇빛 속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살아가기에는 무언가 하나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부족합니다.” 나오지는 유서에서 자신의 삶이 너무 부끄럽다고 토로 한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인간의 인간다움을 규정 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인은 너나없이 나오지의 토로에 공감할 것이다.

▨… 미국의 어느 철학교수는 아시아인의 도덕은 “수치의 문화”이고 서양인의 도덕은 “죄의식의 문화”라고 말했다. 서양인의 그런 평가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모에 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세모를 맞는 가슴을 후벼파는 부끄러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삶을 뒤엎는 결과(자살)로 이어지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부끄러움은 그 부끄러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깨달음이 필연적으로 요청하는 회개에 이르렀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 다자이 오사무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성서와 기독교와 연관되는 일화가 몇 개 전해져 온다. 그의 유서에는 가룟인 유다를 떠올리게 만드는 한마디가 적혀 있다고 한다. “태어나서 미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꾸짖음에 대한 비아냥의 댓글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부끄러운 삶에 대한 진솔한 회개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 어느 젊은 목사께서 전화를 주셨다. “역대 총회장님 가운데 그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라고 고백하신 분이 계셨던가요?” 허허허 웃다가 궁색한 것을 자인하며 한마디를 간추렸다. “대답할 말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 의도에 비아냥이라는 폭력성이 내재해 있는 것 아닌가요? 카뮈가 말했지요.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라고. 그 젊은 목사가 웃었다. “하, 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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