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역사를 감추는 것은 또 다른 역사 왜곡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지만, 
추락한 명예는 회복할 길이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 그렇듯이 일제 말의 성결교회에는 양면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가슴 아픈 역사도 있고,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다. 당시 성결교회는 일제의 종교정책에 따라 신사참배와 국민정신총동원으로 부일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종교정책에 반대하여 구약폐지를 거부하고 재림사상을 고수하다가 일제의 간교한 전략에 속아 해체되었다.

지난 제117년차 총회 석상에 성결교회의 가슴 아픈 역사 가운데 하나인 신사참배 문제가 올라왔다. 한 지방회에서 “우리 교단은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해산까지 당하는 등 지난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사실이 없고, 단체로 신사참배를 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단이 결의하고 신사참배한 것처럼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어 시정 요구를 위해 청원”한 것이었다(<한국성결신문> 2023년 5월 31일자). 찬반 토론 끝에 총회는 ‘신사참배에 대한 바른 역사적 결정은 신중한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며 1년간 더 연구하기로 했고, 이후 총회 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를 서울신대에 의뢰하기로 결의하였다(<한국성결신문> 2023년 10월 25일자). 어떤 것이든 성결교단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은 자명할 것이다. 그래서 신사참배 문제를 판단할 때에 심사숙고해야 할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당시 성결교회의 제도와 조직에 관한 것이다. 일제가 교단적 차원에서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을 당시(1937년 7월), 성결교회의 최고 의결기관은 총회가 아니라 이사회였다. 성결교회는 교단 갈등과 분열의 과정에서 총회 제도가 이사회 제도로 바뀌었다. 1936년 9월 2일부터 8일까지 길보른 총리의 주재하에 고문급 순회목사가 모여 새로운 헌법을 발표한 것이다. 이 헌법에 의하면, “이사회는 동양선교회 조선성결교회를 통치하는 기관”이었다. 이사회가 성결교회의 최고기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결교회는 총회 차원의 결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1938년 2월 총독부 경무국에서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발표한 후, 총회, 연회, 시국간담회 할 것 없이 모든 회의나 모임 등에 앞서 신사참배나 궁성요배 등이 우선적으로 실시되었다. 성결교회도 예외일 수 없었다. 한 예로, 오영필 목사는 ‘제1회 남부연회기’(1941)에서, “이사장 이명직 목사의 사회로 국가에 대한 의식을 엄숙히 거행하고”라고 적고 있다.

다음으로, 최근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신사참배와 관련해 교단 지도부의 방침에 따랐다는 진술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일본 동경기독대학에서 본 테마로 석사학위 논문을 쓴 조용길 목사(일본동맹교단)의 번역으로, 2021년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일제말성결교회 수난사자료: 광주지방법원소송기록 으로 발간했다. 이 자료는 1943년 성결교회가 해산될 당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광주지방법원에 기소되었던 이우영 목사(40세, 임성리교회)와 정희열 목사(37세, 북교동교회)와 관련된 심문기록 문서이다. 이우영 목사의 진술에 의하면, 성결교회의 정치 제도는 전제적 감독제이며, “이명직 목사의 명령 또는 방침은 하나의 신조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하다”고 했다(177쪽). 그리고 교단의 방침은 “본부의 이사회로부터 직접 명령이 내려오고 각 교회는 이것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라고 했다(220쪽). 또한 1938년 봄에 이명직 목사가 신사참배와 관련해 “시국하에서 종래의 교리를 설교할 수 없으므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진술하였다(299쪽). 성결교회 내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개인의 신앙에 따른 것이었다. 교단의 해산은 신사참배 거부 때문이 아니라 재림 사상이 핵심이었다.

끝으로, 신사참배와 관련해 이명직 목사는 일제의 공식적인 입장과 그 궤를 같이 했다.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937년 10월 장로교회 신자의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문부성에서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선조에게 표하는 국가의식이라고 하는데, 공연히 우상이라고 지명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활천』35, 1937년 11월). 1938년 12월에 그가 조선기독교 대표들과 함께 일본의 이세신궁과 메이지신궁 등에 참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시 성결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것이 무엇일까? 불편한 역사를 감추는 것은 또 다른 역사 왜곡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지만, 추락한 명예는 회복할 길이 있다. 해방 후 이명직 목사의 회개가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이명직 목사 전집』제8권,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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