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상록생활에 매진

군대생활 근 5년 동안 어머니는 홀로 빈집에 살 수 없어 다시 친정으로 가서 살았다. 임종렬은 이제 25세가 되었으니 자수성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송산리에 작은 집을 사서 어머니를 모셨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편하게 하려면 우선 결혼해서 착한 며느리를 안겨드려야 했다.

아는 분들에게 부탁해 중매가 들어오면 그는 어머니와 함께 만나러 읍 다방에 갔다. 어머니의 뜻에 맞는 며느리를 선택해서 어머니가 좋다고 한 지금 아내와 서둘러 결혼했다. 아내는 이웃 강진에 사는 김계순 씨로 19세의 키 크고 날씬하고 착해보였다.

그때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숙부가 준 유산이 좀 있어서 당분간 생활의 여유가 있었지만, 그냥 놀 수만은 없었다. 그동안 군대생활에 익숙해서 무엇이든지 없으면 만들어서 해야 하는 의지가 있었다. 1958년 자유당 말기라 농촌은 희망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문득 고교생 때 읽은 ‘상록수’라는 책이 생각났다. 심훈의 소설로, 일제치하 어려움 속에서도 농촌계몽을 위해 청춘을 불사른 주인공들이 기억난 것이다. 그때 그는 그 책을 읽고 감동 받아, 나도 장차 농촌계몽과 부흥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그 때는 군 단위의 시골마다 읍에 중학교가 하나만 있었다. 그래서 큰 마을마다 있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여유가 있는 가정의 아이들은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나머지는 그냥 집안을 돕는 농사꾼이 되었다. 그래서 20~30대가 되어도 중학교에 못가는 청년이 많았다. 그는 그의 마을에 있는 송산초등학교 교장을 찾아가 그의 포부를 말하고, 교실 한 칸을 빌려 야학을 개설했다. 큰 종이에 붓글씨로 쓴 ‘야간 중학생 모집’이란 포스타를 만들어 마을 곳곳에 붙였다. 그래서 배우겠다는 20대 남자들을 학생으로 받아 중학교 교과서 중에 국어, 영어, 수학 중심으로 학년 교과서를 2개월에, 6개월에 3년 공부하도록 속성으로 가르쳤다. 

이 소문이 동네는 물론 이웃마을에 알려져 갈수록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 결과 계속 배우기를 원하는 학생들은 해남중학교에 능력에 따라 편입학 시켜주는 등 보람있게 일했는데, 나중에 마을 어른들의 기부금으로 헌 교과서를 사서 나눠주며 가르쳤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성공하였다. 그 후 전국적으로 ‘잘 살아보세’ 구호와 함께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자 부녀자들도 배우겠다고 찾아와 면사무소 회의실을 밤마다 빌려 가르쳤다. 그들을 위해 목포양재학원 원장 황소엽을 초청하여 양재기술도 가르쳤다.

마침내 정부에서는 새마을 국민운동본부를 창설하고 전국 청년들 중 선발해 일정기간 새마을본부에서 교육 시켜 요원으로 파송했다. 임종열도 합격하여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치자, 파송되어 국민들의 계몽운동에 앞장서게 하고 월급도 지급되었다. 그는 해남 문내면 요원으로 파송 순회교육을 했다.

한번은 배당된 자연부락에 강사로 가서 먼저 그 마을의 이장부터 만났다. 그 이장을 많이 본 듯 했으나, 이장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도 모른 체하며 주민들을 모으는 일에 협조를 부탁하고 정신교육 강연을 잘 마쳤다. 

그는 제대 후에 착수한 사회 계몽운동이 상록수운동에서 비롯된 것을 알고 이를 스스로 ‘상록운동’이라고 불렀다. 이 운동이 국가가 주도하는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져서 보람을 느꼈지만  6년이나 지나고 보니, 국가에서 시키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 싫증이 났다.  그래서 이보다 더 보람찬 일이 없을까? 하는 영적 고민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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